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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Jul 25. 2017

04. 임신

임신을 했다. 그동안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했는데 임신은 한순간이었다. 그동안의 고생고생 마음고생을 생각해서라도 조금은 특별하고 로맨틱하게 그날이 왔으면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알았던 그날도 해는 똑같이 떴고, 무더웠다. 병원에 가는 길 내내 주말임을 일깨워주듯 차는 막혔다.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출생률 최저 국가니 뭐니 해도 산부인과엔 사람이 많았다. 다들 훈장처럼 배가 불러 있었다. 왠지 뻘쭘해졌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가운데 있는 의자엔 앉을 자신이 없어서 창가 옆 큰 화분이 놓인 구석자리에 앉았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초조했다. 곧 내 이름이 불렸다.


H와 손을 잡았다. 굳건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잡은 H의 손이 약간 축축했다. 그도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 년이었다. 그와 나의 마음고생의 기간. 합이 십 년. 게다가 나보다 네 살 많은 그는 매년 나이를 먹어가니 나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가 심했을 거다.


'오늘 아침에 테스터기를 했는데 두줄이 나왔어요. 아, 그런데 선이 좀 흐려서요..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변명을 했다.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어디 봅시다. 봐야 정확히 알겠죠?'


여자 의사 선생님이었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분이었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굉장히 시크한 말투와 눈빛이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은색 스타벅스 텀블러는 그녀의 도도함을 한껏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 짧은 순간 말투에서 느껴지는 전문성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떨떨하게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축하합니다. 임신이네요. 6주 정도 되었어요. 2주 후에 와서 확인 한번 더 합시다.'


오 하나님 맙소사. 임신이란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 축하합니다 라는 말 조차 이렇게 시크하게 할 수 있나. 하긴 오늘 내가 스무 번째 임신여성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나의 임신은 시작되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왠지 모든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매일 달고 살던 커피도, 두통으로 인한 타이레놀도 당분간은 안녕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주말이라 신나게 칼국수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이 나을 것 같은 생각에 달걀과 고기와 샐러드가 있는 브런치를 먹었다. 이탈리아 비행기표와 숙소 등등을 취소했다. 백만 원이 넘는 위약금을 내게 생겼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일주일의 긴 휴가기간 동안 집에만 있게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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