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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Oct 30. 2017

16. 이웃사촌

해뜨기 전에 후다닥 나왔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습관적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 몇년간 계속 가오던 길을 익숙하게 지나 회사에 도착한다. 하루종일 죽도록 일하고 저녁먹는 시간이 아까워 야근을 위한 김밥을 한줄 책상위에 두고 잔업을 처리한다. 밤하늘 별을 볼 새도 없이 지하로 내려가 다시 차를 몰고 아침에 나왔던 그곳에 도착한다. 오늘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바람이 불었는지 꽃이 피었는지 알 새가 없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앞집에 누가 사는지 알수가 없었다. 매일이 그랬다. 미드미가 생기기 전까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십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긴 방학을 맞았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아점을 먹고 가을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왔다. 툭 튀어나온 배가 우스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배를 문질렀다. 9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내렸다.


'어? 옆집 사시는 분이시죠?'

엄청 밝고 쾌활한 분위기의 여자분이었다. 친화력이 너무 좋아서 마치 예전부터 알고지낸 사람인줄 알았다. 괜히 어색했다.

'아, 예. 9층이세요?'

'어머, 저 옆집살아요. 저기 저 빨간 유모차 있는 집.'


우리 층엔 총 4집이 살고있다. 그간 누가 사는지는 몰랐지만 옆집과 대각선 앞집에 각각 유모차가 있는걸 봤다. 빨간 유모차와 검정 유모차. 두집 다 아기가 있나보구나, 했었는데 그 집 사람이었군. 싶어 나름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뵙는것 같아요.'

'그러게요! 다음에 뵈면 차 한잔 해요!'


얼떨결에 그러마고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차한잔? 그게 가능할까. 그저 지나가는 인사겠지. 그래도 참 쾌활한 사람이네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며칠쯤 됐을까.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택배가 올게 있나?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옆집 그녀였다. 차 한잔 하자는 말과 함께. 세상에. 서울 시내, 아파트에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녀의 집에서 차를 마셨다. 검정색 유모차 주인도 함께였다. 이미 둘은 꽤 친해보였다.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 어색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친밀했다. 전부터 우리집이 궁금했다고 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후, 빨간 유모차 언니를 만날때면 꽤 반가웠다. 알고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성격이 더 활발했고 쾌활했으며 덕분에 아파트 비타민이었다. 모든 층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것 같았다. 언니 덕분에 앞집 아주머니와도 인사를 했다. 김장철엔 서로 다투어 김치를 가져다 주었다. 젊은 새댁이 김치는 담글줄 아냐며 여기저기서 받은 김치가 한통이었다. 제육볶음을 너무 많이 했다고 가져다 주기도 하고, 어머님 생신이라 잡채를 했다며 한 접시를 가져오기도 했다. 미드미 입히라며 옷을 물려주기도 하고, 가끔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가져다 버려주기도 했다. 임신한 젊은 새댁(?)이라는 이유만으로 세 집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다.


미드미를 낳고 키우는 지금도 한결같이 도움을 준다. 이유식이 어려울때면, 감기로 고생할때면, 아기의 건조한 피부가 걱정이라고 말만 하면 서로 도움을 준다. 이제는 나도 내놓은 복도의 남색 유모차 위에 올려진 예쁜 인형과 탐스러운 배를 보며 언니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서울이라는 각박한 도시. 빨갛고 파란 불꽃이 가득한 사람들을 품었지만 회색인 도시. 그 도시 안에서 이런 정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아기가 있기에 어쩌면 조금은 더 쉽지 않았을까 싶은 관계들. 그 관계들 안에서 오늘도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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