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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Dec 29. 2017

22. 잠

 하필이면 그때 왜 배가 고팠을까.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안에 잘못 놓인 그릇 하나가 옆에 있던 냄비 뚜껑을 톡 치며 옆으로 떨어져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아차, 육아 퇴근이 코앞이었는데. 귀가 밝은 미드미는 그때를 놓칠세라 외쳤다. '으앙!'

 미드미를 키우며 아차!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소음'이었다. 미드미는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움의 가장 최고상태는 잘 때였다. 미드미가 잘 때면 잠시나마 방에 들어가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기도 하고 쇼핑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영화를 보기도 했다. 이유식을 만든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밀린 집안일을 좀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미드미가 혹시라도 깰까봐 두려워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있었던 습관이 이미 깊숙하게 들어버린 뒤였다. 그녀가 잠든 동안에는 모든 일을 멈추고 그저 눈만 껌뻑거리며 숨을 쉬는 게 다였다. 미드미는 작은 소음에도 민감했고 금세 깨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미드미는 잠 패턴이 일정해지기 시작했는데, 보통 저녁 8시에 잠들어 아침 8시쯤 기상을 했다. 그리고 중간에 두 번 낮잠을 잤는데 한 번은 40분 정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한 시간 반이 조금 못되었다. 하루에 총 깨어있는 12시간 중 낮잠 두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열 시간. 그 열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근무 시간이었다.


 나는 열 시간 안에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세 번의 이유식과 네 번의 수유, 이틀에 한 번씩 이유식 만들기, 집안의 빨래와 청소, 각종 설거지, 미드미와 신명나게 놀아주기, 목욕, 그리고 H의 저녁식사까지 책임져야 했다. 실질적인 근무시간은 10시간이었지만 굉장히 타이트해서 중간에 커피 한잔 마실 시간조차 없었다. 그 열 시간 동안 미드미는 직장 상사만큼이나 끊임없이 나를 불러댔고, 내 바지에 엉겨 붙었고, 여기서 쿵 저기서 쿵 부딛혀 울었으며, 여기저기서 사고를 쳤다. 차라리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액션이 있으면 안심이었고 조용하다 싶으면 백 퍼센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미드미는 화장실을 사랑했고 쓰레기통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베란다를 탐험하는 것이 큰 과업인 것처럼 보였다.


 하루를 정말이지 빠듯하게 보내고 나면 미드미가 잠이 들었다. H와 나는 그때부터 고요함 속에서 대화를 했다. 안방에서 속닥속닥 속삭여야만 했고 TV를 보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육아 스트레스가 상한가를 치던 어느 날 H는 치킨을 먹으며 나 혼자 산다를 보겠다는 커다란 일념을 가지고 호기롭게 배달 주문을 했는데, 다시 육아 전선으로 출근해야 하는 사실이 두려워져 추운 날 벌벌 떨며 문밖에서 치킨을 받아와서는 도둑처럼 집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었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TV에 이어폰을 연결해 한쪽씩 끼고 봤던 그날의 예능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낮에는 그렇다 쳐도 밤이 문제였다. 미드미는 침대에서, 나는 바닥에서 자곤 했는데 나는 꽤 뒤척이며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H처럼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정도는 아니었고 꽤 작은 바운더리 안에서 약간씩 움직이는 정도의 뒤척임이었는데, 미드미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조금 뒤척이면 '애앵' 또 조금 움직이면 '힝'. 덕분에 밤새도록 목석처럼 가만히 누워 자거나 몸을 움직일 때면 슬로모션으로 조오오시이임히 움직이곤 했다. 잠귀가 어두운 H는 미드미와 자는 동안 엄청나게 움직이며 코까지 드르렁 골면서 잤는데도 미드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는 반대였고, 덕분에 내내 피곤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런 생활이 지속되겠지. 잠이라는 게 이렇게 소중한 것이라니, 요즘은 미드미 덕분에 인생의 소소한 고마움에 눈뜨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씩 소리에 둔감해지는 미드미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언젠가는 미드미도 H처럼 푹 잠이 드는 그날이 오길.



 

 나와 함께 자고 일어난 날이면 미드미는 기분이 좋아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날 깨운다. 푹 잘 자고 일어난 아가의 모습이랄까. 하지만 H와 함께 자고 일어난 날이면 엄청나게 피곤한 컨디션임이 눈에 확연히 보인다. 반면에 H는 기운이 넘쳐난다. '어젠 미드미가 한 번도 낑낑거리지 않고 잘 잔 것 같아. 역시 나랑 자는 게 좋은 거 같아. 그렇지?'라는 말과 함께. 우리집 진정한 승자는 단연 H,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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