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 회장이 되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작은아씨들』

by Rani Ko

5학년 때, 나는 학급회장이 되었다.


그 무렵 우리 반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권력과 그에 따른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자아이들끼리 무리를 이루고, 그 한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이, 원지(가명)는 5학년 8반의 여왕벌이었다.
학기초부터 아이들은 은근히 그녀를 따랐고, 원지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다는 이야기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을 만큼 원지네 집은 부유했었다.
원지는 유명 메이커 가방을 메고 다녔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새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몇 명의 친구들이 함께였다. 그 무리는 관계가 무척 돈독해 보였고,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값비싼 옷도 없었고, 나를 중심으로 모인 친구들도 없었다. 옷은 나름대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녔지만, 그뿐이었다. 내게는 아이들이 "우와!"할 만한 메이커의 책가방이나 값비싼 평상복이 없었다. 학생에게 굳이 비싼 옷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가치관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 기준이 지금의 나에게도 그대로 남아 아이들 옷을 고를 때도, 내 옷을 살 때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3월 중순에 각 학급 임원 선거가 치뤄졌다. 10명이 넘는 꽤 많은 아이들이 후보로 등록되었고 후보들의 연설이 진행되었다. 나는 어젯밤 준비해 간 원고로 무사히 후보 연설을 마쳤고 이어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사각사각"

학급 친구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써주는 소리가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라니... 누군가 내 이름을 꼭 적어주기를 바라며 나도 투표를 했다.


예선 투표에서 원지와 나는 나란히 압도적인 표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우리 둘 다 점이었다. 내 기억에 당시의 학급 임원은 남자 회장 1명, 여자 회장 1명이었고 부회장은 따로 없었던 걸로 안다. 결국 원지와 나 둘 중에 한 명은 붙고 한 명은 떨어지는 상황이 나온 것이다.

'아.. 하필 원지와 붙다니..'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원지가 인기가 많았던가? 그런 것은 잘 모른다. 다만, 그녀는 자신만의 무리를 가지고 있고 옷도 나보다 화려하게 입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재투표가 결정되자 교실 안 공기가 달라졌다. 최종 후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원지가 먼저 하게 되었다. 원지는 집에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미 두 번째 연설문을 준비해 왔었다. 말의 순서도, 강조할 부분도 분명해 보였다. 목소리는 조금 작았지만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반면 나는 이미 준비해 온 원고를 다 써버린 상태였다. 다시 쓸 시간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여유도 없었다. 결국 나는 원고 없이 연단에 섰다. 뭐라도 말을 지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짧은 말이었고, 꾸민 표현도 없었다. '가장 낮은 자세로'라는 말은 평소 성당에서 성경 말씀이나 신부님의 강론에서 자주 듣던 표현이었다. 하지만 맹세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지지해 주는 친한 친구들도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떨리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아마도 4학년 때 진 선생님이 주신 용기와 칭찬으로 인해 조금씩 쌓아 두었던 자신감이 그제야 나를 앞으로 밀어낸 게 아니었을까.




결과는 뜻밖이었다.
나는 남학생들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원지와 늘 함께 다니던 무리를 제외한 여학생들 역시
나에게 표를 던져 주었다. 표 차이는 분명했다. 나는 여자회장이 되었고 결국 떨어진 원지는 무리에 둘러쌓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해야 되나?' 란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건 내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 듯 싶었다.

다만, 투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용기를 내어 원지에게 다가가 '2학기에는 꼭 되길 바란다.'는 위로는 해주었다.


그날 이후, 한 학기 내내 나는 원지의 그 무리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류, 함께 있어도 쉽게 섞이지 않는 공기.


그래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으므로. 불편한 관계가 됐지만 괜찮은 척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역할에 집중했다. 당시엔 특별실이나 복도 또한 전부 학생들이 청소를 담당했던 시절이었다. 4학년 시절과는 다르게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본인이 청소하시기 보다 학생들에게 청소를 맡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 담당이었던 화장실 청소도 군말 없이, 오히려 자주 나서서다.




그 시절 나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작은아씨들』이란 소설을 읽고 있었다. 각기 다른 네 자매의 삶을 들여다보며 책 속에서 가장 멋있다고 느낀 건 글을 쓰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던 둘째 딸 **조 마치**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나는 조처럼 말이 앞서 나가지 못했다. 대신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을 먼저 맡았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쪽에 더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무 말 없이 피아노 옆에 앉아 있던 셋째 딸 **베스 마치**가 왠지 모르게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앞에 나서지는 않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내던 아이.

그때의 나는 조처럼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베스처럼 조용히 남는 쪽이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급 회장이 된 뒤에도 말보다 먼저 움직였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리를 먼저 채웠다. 처음으로 회장이 되어 리더라는 자리에 섰지만, 그 자리를 권력처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회장이라는 자리가 누군가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를 통제하거나 편을 가르기보다,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쪽을 택했다.



회장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꾸준히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때로는 귀찮고 눈에 띄지 않는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이유 없이 시샘을 받는 일도 있었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앞에 서서 빛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그 시절의 나는, 서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그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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