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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탄생기

내 아이는 나의 기적입니다 1

by Rani Ko

나는 둘째 아이가 36개월이 되도록 미처 몰랐다. 그저 순해서, 착해서 얌전하고 조금 느린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형보다 모든지 늦되어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목도 늦게 가누었고 걸음마도 뒤늦게 18개월에야 온전히 걸을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육아서적을 참고해 봤을 땐 만 10~18개월 사이에 걸음마를 뗄 수 있다고 나와 있어서 막차를 탈 정도로 느린 아이라고만 여겼다.

'얘는 원래 뭐든지 느린 아이야.' 이런 식으로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의 자기 합리화로 잠재우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어렵사리 찾아온 첫째와는 다르게 둘째는 쉽게 생겼다. 임신인 줄도 모르게 몸의 변화도 없어서 임신 사실을 인지한 것도 3개월이 다 되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내 몸을 조심하고 아끼기보다는 지금 생활에 변화를 주기 싫은 마음과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노산에도 불구하고 첫째를 임신했을 때처럼 직장생활을 계속했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첫째를 가졌을 때는 퇴근 후에 집에 오면 쉴 수 있었지만 둘째 임신 기간엔 그러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퇴근 후에는 나의 전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만 3살의 첫째가 나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도 종일 어린이집에 있었을 첫째를 위해서 놀이터에서 놀아줘야 했고 저녁밥을 차려서 먹이고 치워야 했다. 아이를 씻기고 양치시키고 또 집안의 각종 분리수거 등은 남편이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엄마인 내가 할 일이 더 많았다.




그러다 2017년 5월 중순, 허리가 쑤시고 배가 살짝 당겨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갔다가 자궁경관무력증 진단을 받고 그 길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자궁 경부 입구가 다 열였어요. 내일 응급으로 맥도널드 수술을 할 겁니다. 이대로 두면 아이가 흘러내려요.

몸에 이상을 못 느꼈습니까?" 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그제야 얼마 전부터 허리가 뻐근했고 쿡쿡 쑤셨던 통증을 기억해 냈다.

"허리가 쑤시고 계속 아프긴 했어요. 배뭉침도 있었던 것 같고.. "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제 겨우 22주 지났을 뿐인데 벌써 조산기가 비치면 어쩐단 말인가. 작년에 동생이 아이를 28주도 안되어 조산해서 아이의 느린 발달과 성장으로 인해 무척이나 마음고생, 몸고생 한 일이 생각났다. 옆에서 동생을 지켜만 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 일이 내 일이 되다니... 속상하기도 했지만 짜증 또한 솟구쳤다. 당장 큰 애는 어디에 맡길 것이며 직장에는 뭐라 얘기한단 말이야.. 해결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몸 관리 못한 나 스스로를 탓하긴 보단 이런 상황을 만든 강하지 못한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괜스레 뱃속 아이 탓을 했다. 바라던 성별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엄마 고생시키는구나 싶었다.


사실 아이가 무슨 죄인가. 그저 엄마 욕심에 둘째는 간절히 딸이길 바랐는데 또 아들인 걸 알고 스트레스받아 밤잠 설쳐가며 건강관리 못하고 태교 못한 내 탓이 큰 것이지... 이젠 성별이고 뭐고 그저 달 수 꽉꽉 채워서 건강하기만 하다면 감사할 지경이 되었다.


임신 중이라 전신마취를 못하니 눈가리개를 한 채로 하반신 마취만 하고 헤드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수술을 받았다. 다 끝나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최선을 다했고 2번이나 묶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지만 실은 워낙 약하니 엄마가 스스로 최대한 조심해야 돼요. 잘 버텨봅시다. 누워만 있도록 하고 베개 받치고 발은 가급적 올리고 있어요. 질정제도 매일 처방할 거니 자기 전에 꼭 넣어요."


만 34주, 아이의 폐가 완성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꼭 품고 있으리라 다짐했다. 엄마 뱃속에서 가장 늦게 형성되는 기관이 폐였다. 34주는 돼야 폐가 완성되기 때문에 그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보통 호흡기능이 좋지 못하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이유도 자가 호흡이 되지 않는 이유가 크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큰 애는 시댁에 맡겨졌다. 일주일에 2번 정도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면회를 시켜주었다. 가족들이 모두 고달픈 시기가 온 것이다. 갑자기 엄마와 떨어진 첫째는 분리불안 증상이 오기 시작했고 당시에 해외 출장이 잦았던 남편도 본가와 빈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며 피곤한 시간을 이어가야만 했다.


나는 나대로 병원에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 주는 밥을 먹고 그릇 반납하러 가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누워만 있었다. 머리도 남편이 면회 오는 날 감겨달라고 하거나 정 집집 하면 병원이 조용한 밤 시간에 복도 벽을 붙잡고 살살 걸어가서 샤워실에서 얼른 씻고만 나왔다. 초반엔 서 있는 것도 불안해서 샤워실에 욕실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씻었다. 자기 전엔 매일 질정제를 스스로 넣어야 되는데 그것도 고역이었다.


그러다 그만 산전 우울증이 세게 오고야 말았다. 임신 당뇨수치도 높게 나와서 식단 관리까지 들어가니 드디어 우울증이 걸린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내가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야 하며 먹는 것도 제한이 걸리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어차피 뱃속 아이가 나오는 순간 너는 신생아 육아 지옥에 다시 빠질 것이니 지금의 이 한가함을 즐기라고 위로했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누워만 지내니 면역력도 떨어져 날마다 혓바늘이 돋고 입술이 헐었다.


몸과 마음이 많이도 헝클어졌던 그때 정신줄 붙잡고 나도 아이도 살기 위해서 법륜 스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썼다. 처음엔 일기를 쓰다가 매일 같은 말만 반복적으로 쓰는 것 같아 병원에 비치된 잡지들을 읽고 독자 기고문을 쓰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어서 주로 육아 잡지가 많았는데 기고한 내 글이 채택되어서 카시트를 비롯한 육아용품을 부상으로 받기도 했고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모 잡지사에서 소정의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또한 병원에서는 외래 환자나 입원 환자인 예비 산모들을 위해 퀼트 교실도 무료로 운영해 주었다. 주 1회 1시간의 수업이 있는 날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서 바느질을 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5월 중순부터 34주가 되는 8월 중순까지 꼬박 3개월을 4인 입원실에서 버티다 첫째가 너무 보고 싶기도 했고 나도 답답해서 결국 퇴원하기로 결정했다.

입원 중에 태교 활동으로 무료퀼트 교실에서 직접 만든 모자 강아지 인형. 심신 안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담당 선생님과 꼭 한 달을 더 채우고 9월 중순 제왕절개 수술날(CS)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마치 감옥을 탈출한 빠삐용 같이 만세를 불렀다. 일주일도 못 채우고 조산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우울증은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너무 방심한 탓이었을까. 집안일을 살살한다는 게 또 무리를 하고 말았는지 퇴원한 지 일주일도 채 채우지 못하고 양수가 터져버렸다. 나는 첫째도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했기 때문에 둘째는 무조건 제왕절개로 낳아야만 했다. 양수가 터지면 위험했다. 곧바로 다시 그 병원 응급실로 가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장기 입원으로 내 얼굴을 아는 간호사분들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며 나에게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하칠 그날이 일요일 저녁이어서 담당 의사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 이왕이면 첫째를 수술해 주셨고 3개월 동안 날 돌봐주신 담당선생님께 받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분께 응급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응애~ 응애~ 응애~"

분만실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는데 형아 때보다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산모님. 아이는 건강합니다. 여기 보세요."

내 왼편 어깨너머로 간호사가 아이를 안아 보여주었다. 40주 꽉 채우고 3.56킬로로 태어난 형아보다 1킬로 이상 적은 몸무게인 2.38 이른 둥이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날 보며 연약하지만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안녕, 아가야. 엄마한테 오느라 고생 많았어."

나는 쪼꼬미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엄마 뱃속에서 빨리 나오지 않기 위해 애써 버텨준 나의 아이는 비록 이른둥이였지만 약간의 저체중임을 빼곤 지극히 정상이고 호흡도 잘 돼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고 영양 분유 수유를 겸하는 것으로 첫 효도를 하기 시작했다.


둘째와의 정식 첫 만남. 이제 만 8세가 다 되어가지만 둘째는 아직도 마냥 어린아이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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