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 안다는 것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 고(故) 백세희 씨를 추모하며

by 랭크작가

내 주변에 스스로를 사랑스러워 하는 사람이 딱 한명 있다. 어쩌면 남들이 보는 자기 자신보다, 자기 눈에 보이는 자신이 (내적·외적 포함하여) 훨씬 더 예쁘고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자기만 만족하는게 무슨 소용이냐 할 수도 있다. 특히 보여지기가 중요한 요즘 시대에 자기객관성, 메타인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자신의 삶을 옭아맬 정도가 되면, 오히려 겸손이 자기 가치 하락쪽으로 빠지며 자기객관성이 떨어질 수도 있게 된다.


반대로 남들이 볼 때 굉장히 완벽해보이지만, 끊임없이 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사람의 내면에는 기본값으로 '화장을 안하곤 절대 약속에 안나간다든가, 남들에게 정돈된 집과 완벽한 착장을 갖춘 컨디션만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다. 성취적으로는 승진할 때가 됐는데 안하면 안되는거고, 결혼할 때 됐는데 결혼 전이면 안되고, 애 낳을 때가 됐는데 안낳으면 안되는 것이다.


첫번째 말한 사람은 남들이 봤을 때는 여자치고 너무 짧은 머리에 잡티를 가리지 않고 과감한 노메이크업을 하고, 편한 옷만 입는 예쁘다고 하긴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꾸미지 않은 그런 자기 모습이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존감이 높아서, 그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반면에 두번째 말한 친구는 자기가 노력해서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자기모습과, 꾸밈없이 방치된 자기 모습이 하나의 자신이 아닌 두개의 페르소나로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꾸밈 없는 자신의 모습은, 자기의 본질이 아니며, 자신이 외면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연예인 설리씨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팬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어떤 내면과 인성을 갖고있는지는 몰라도, 부정할 수 없이 외모 자체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하루만이라도 그 얼굴로 살아보고 싶었을 특장점을 갖고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모습이어도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나보다. 난 이것이 대체로 유년시절과, 길러진 환경에 따른 자존감에 많이 좌우된다고 추측한다.


돌아가신 분들의 속사정은 훨씬 더 알 수 없고 복잡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생의 마감을 선택한 故백세희씨도, 혹시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스스로 알았다면 아깝고 안타까운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금 더 알 수 있고, 알기 쉽고, 돌아보기 쉬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아까운 청춘들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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