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빈 방 하나 양보하세요
아빠의 방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방을 들여다 본 적은 언제인가? 얼마 전, 돌아가신 아빠의 서재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아빠의 체취가 담긴 다양한 물품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사회 생활을 하셨고 평소 대범하셨던 아빠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아빠의 서재에는 소소하고 다정한 추억이 깃든 일상 용품들로 가득했다. 빛바랜 가족 사진들, 그 사진들에는 잊고 지냈던 가족들의 찰나가 켜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상의 메모들이 빼곡한 다이어리들과 손 때 묻은 책들. 그 때 서랍장 한 켠에 잠잠히 놓여있는 아빠의 낯선 얼굴이 눈에 띄었다. 아빠의 젊은 시절, 20대 때의 사진들이었다. 거기에는 늘 보아오던 나의 아빠이지만 한편,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늠름한 아빠 아니, 젊은 청년의 모습이. 가족 누구도 몰랐던 아빠의 20대 영혼이 영롱한 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빠의 방에서 낯선 한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아빠를 비롯하여 모든 아빠들은 자신만의 ‘방’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의 남편도, 얼핏 듣기로 내 친구들의 남편들도 그러하기에. 좋아할 뿐 아니라 꼭 일정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어 한다. 자신을 펼치고 드러낼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 그렇다면 꼭꼭 닫혀진 문틈 사이로 엿보고 싶은, 아빠들의 골방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골방은 아빠들의 시선을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끄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여성들이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대신 보여지는 성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골방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남성들을 외부의 그 어떤 시선으로부터도 차단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때문에 남성들은 예외없이 골방에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사회적 지위와 해결해야 하는 직무, 거추장스러운 예의를 모두 벗어버리고 온전한 ‘나’로 돌아온다. 그 때 직면하게 되는 감정은 안도감과 해방감이다.
고대부터 남성들은 자신을 돌보기보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본능을 지녀왔다. 아침부터 잠들기까지 매일 팽팽한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골방은 그런 남성성을 해체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낯선 세계에서 남성들은 아빠의 탈을 벗고 벌거벗은 자아 비로소 ‘나’를 대면하게 된다.
<남자의 공간>(이문희,박정민 저,<남자의 공간>, 21세기북스, 2013)에서는 골방을 ‘나를 위해 건강한 도피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규정한다. 특히 중년이 되어 변화가 두려워진 남성들이, 자신의 마음을 수시로 살펴보고 깨달은 바를 지속시키는 ‘정신적인 힘’을 기를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한다. 휴식 공간을 넘어서서 나를 돌보고 연마하는 곳,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공간이라고. 그곳에서 아빠는 ‘보여지는 나’를 내려놓고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으며 근심이 사라지는 몰입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몰입은 사람들의 심리적 에너지를 최대치로 높여준다. 또한 집착을 없애준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얽매인 그 어떤 외부상황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라는 작가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회적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역설적으로 내 ‘방’에 대한 여행기를 써서 히트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귀족 가문에 태어나 열여덟 살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직업 군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혈기어린 젊은 시절 결투를 벌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법적으로 감금(42일간 가택연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는 집에 갇혀 지내면서 사색을 통해 ‘방’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육체를 타인으로, 영혼을 나로 규정하여 독창적이면서도 거침없는 자전적 산문을 썼다. 그의 산문은 남성성을 탈거한 그야말로 ‘자유’를 구사한다. 한편 여리면서도 때론 저돌적인,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 몰입하는 순수함의 절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픈 사랑과 무심한 우정에 홀로 방구석에 처박힌 그대여, 보잘 것 없는 헛된 세상사를 털어 버리고 떠나자!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세상 모든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떠나자!(중략) 우리를 가로막을 게 무언가. 우리 자신을 기꺼이 상상에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을 여행하는 법>, 유유, 2016, p13)
반드시 물리적인 '방'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삶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와 본연의 순수함을 발현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어도 무관하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빠들에게 맘껏 자신을 있는 그대로 껴안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골방, 마음의 여유 한 스푼을 꼭 선물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