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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May 19. 2023

서른여섯 번째 생일에 '태어남'을 생각하다

라니에세이 5 #태어남


Intro

나이에 숫자가 더해질수록 태어남, 나이듦, 삶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생일이 다가올 때쯤이면 유독 그렇다. 시끌벅적, 요란하게 사람들과 맞이하는 것보다 차분히 그날의 의미를 돌아보는 게 더 편안해진 요즘이다. 올해 서른여섯 번째 생일을 홀로 맞이하며 ‘태어남’의 의미를 돌아보았다.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늘 ‘봄’이라고 대답했다. 그중에서도 3월의 봄을. 봄은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이니까. 포근한 바람결이 좋았고, 삭막했던 자연 풍광에서 연녹색과 붉은빛이 움트는 생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3월의 봄을 좋아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금 유치하기도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계절, 내가 태어난 달이라는 이유로 3월의 봄을 더 좋아했었다. 


1년에 딱 하루뿐인 생일은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충분한 핑곗거리였다. 대학교 다닐 때 생일은 늘 개강 시즌과 맞물려있었다. 학과, 동아리 선후배, 친구들을 몽땅 불러내어 개강 모임, 신입생 환영회 모임을 요란한 생일 파티 자리로 만드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는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축하를 받는 그 자리를 무척 즐거워했었다. 당연히 생일의 의미를 다듬어 볼 겨를도 없었다. 생일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날일 뿐이었다. 


생일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생에 태어나 큰 이슈나 사고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한평생을 70세로 친다면, 서른다섯 번의 생일을 보낸 지금은 한 생의 딱 절반을 산 셈이다(100세 시대, 더 오래 살 수도 있겠지만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는 70세 정도로 생각한다.). 놀고, 먹고, 즐기기만 하며 보냈던 생일에 ‘태어남’의 의미를 진중하게 생각해 보게 된 무렵이기도 하다. 


《무탄트 메시지》는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책이다. 여중생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다.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생일의 의미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참사람 부족들에게 생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건 저절로 이뤄지는 것, 나이를 먹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축하하느냐는 질문에 답은 이랬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철이 드는 건 아니라는 얘기가 있다. 예전에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말씨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될 땐 ‘나잇값’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이는 수치화할 수 있지만 ‘나잇값’을 매기는 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평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 한 해에 비해 더 나아진 모습, 생각,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생일을 계기로 나잇값을 스스로 매겨본다. 조금이라도 성장한 부분이 있다면 조용히, 내면을 향해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잘 하고 있어. 잘 살아내고 있구나.’라며. 


“우리는 무슨 인연으로 이 세상에 왔는가.” 


법문에서 이 물음을 종종 던지는 스님이 계신다. 태어남과 살아감의 의미를 상기시키기 위한 질문일 것이다. 행복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이자 동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만족스럽고 못마땅하고 심지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시선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도 있다. 


이어지는 스님의 말씀은 이렇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것을 겪기 위해서, 지금 함께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나의 선택으로 인해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저항하고 거부할수록 고통의 강도는 더욱 세진다. 나의 선택인 만큼 내 앞에 놓인 인연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행복한 경험이든 불행한 경험이든,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든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든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나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니.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말씀이다. 


어렸을 적, 나도 비슷한 질문을 허공에 대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왜 하필 이 집안에서 태어난 거야. 왜 이렇게 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난 거야.’ 그 물음에는 원망과 비관이 온통 뒤섞여 있었다. 나는 아홉 식구의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가족 수만큼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절, 겨우 열몇 살의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던 일들을 감내해야만 했던 때였다. ‘태어남’에 대한 첫 질문, 뿌리는 그 시절, 그 경험, 그 관계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서른여섯 해를 맞이한 지금,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도 ‘태어남’을 대하는 감정에 원망, 비관, 억울함, 불행이 뒤섞여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약 삶의 시기를 조각내어 구분한다면 그 순간을 불행 혹은 행복으로만 표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삶은 시기를 나눈 조각이 아닌 전체를 관통해서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온 시간 전체를 ‘삶’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테니까. 


그때는 불행한 경험, 나를 힘들게 한 관계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지금까지 살아온 서른다섯 해의 삶 가운데서 그 시기를 짚어보면 오히려 다행, 그리고 감사함으로 채워진다. 지금의 나로 살 수 있게 해준 경험,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관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그 경험,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는 부단한 성찰과 사유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렸을 적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가족이었다. 대학 시절을 함께 한 친구, 선후배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함께 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생일에 만나 태어남을 함께 축하하는 사람들 또한 매번 다르다. 아마도 그 무렵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 시기에 경험하는 것들을 가장 가깝고 깊게 나누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스쳐 갔다. 


서른여섯의 생일을 보내며 ‘태어남’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들 틈에서 요란스럽게 파티를 열지는 않았다. 대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었던 지난 생일과는 달랐다. 지금을 함께 보내고 있는 그들을 주인공의 자리로 조용히 초대했다. 이생에 태어나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해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작년보다 조금 더 나아진 마음으로 삶을 대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잘 살아내고 있다고. 그래서 너의 태어남을 다시 한번 더 축하한다고. 요란스럽지 않게, 그렇게 서른여섯 번째 3월의 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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