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면 퇴근

전직 100일을 맞이하며

by 라니

지난밤에 학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수업이 시작됐는데 교과서가 없다며 사물함에 다녀오겠다는 학생이 많다. 다녀오라고 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몇몇 학생들이 안 오고 있다. 사물함 갔다 온다는 핑계를 대고는 어디서 노닥거리는지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나는 몹시 화가 난다. 나를 우습게 보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너무 분해하며 잠에서 깼다. 20년 가까이 해온 일이니 앞으로도 이런 꿈은 종종 꿀 것 같다.


지난 12월 9일에 전직 100일을 맞이했다. 선배 동료가 “적응 됐어요?”라는 물었고 나는 “적응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100일을 맞아 동료들이 열어준 축하 모임에서는 이런 소감을 말했다. ”출근하면 퇴근이에요. 잡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 퇴근하고 현관문 앞에 서서야 우리 애들이랑 고양이 생각이 나요” 둘째가 가끔 지각을 하지만, 애들은 스스로 끼니를 챙겨 먹으며 잘 커가고 있다.


전직 후 가장 큰 변화는, 애들을 향한 태도의 변화이다. 나는 애들에게 굉장히 너그러워졌다. 업무 하면서 접하는 학생 사례들이 대부분 온전치 못한 사례들이다 보니, 별 탈 없이 건강하게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애들이 너무너무 대견스러웠다. 이러한 내 태도의 변화는 전직 후 잃은 것들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크다.


몸은 많이 적응됐다. 왕복 90km 운전, 12시간 사무실에 앉아 있지만 허리가 아프지 않다. 허리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1~2회 달리기를 지속하고 있고 자기 전에 플랭크 운동도 하고 있다. 전직 한 달쯤 지났을 때, 몸의 경고등이 켜졌다. 앉아만 있었는데 낮동안에 심박수가 올라간 게 느껴졌고 스마트워치를 확인하니 심박수가 100에 가까웠다. 달리기 한 후에 느껴지는 심박동이 상쾌함이라면, 이때 느껴지는 심박동은 불안함이었다. 불현듯 둘째를 낳고 키울 때가 생각났다. 늦은 오후가 되면 코끼리 한 마리가 어깨에 올라가 있는 피곤함이 느껴지던 그 시기, 희한하게도 시어머님이 보내준 흑염소를 먹자 원기가 서서히 회복되었었지. 비건지향을 잠시 내려놓고 한살림에 가서 흑염소를 샀고 매일 아침 공복에 먹고 있다. 흑염소 덕분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거짓말처럼 심박수는 쉽게 정상을 되찾았다.


업무는 계속 배워가고 있다. 민원 전화받는 것은 아직도 긴장되는 일이지만, 선배들에 따르면 전화응대는 연차가 늘어가도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한 번은 악성민원인에게 전화를 받다가, 내가 성의 없이 응대하는 것처럼 들렸는지 민원인이 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었다. 개별 업무가 아니라 팀에 속해 업무를 하다 보니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어려운 일은 도움을 받아가면서 해나가고 있다. 지피티의 도움도 받고 있고, 예전에는 쓰지 않던 한글 단축키도 많이 익혔다.


성취감이나 보람은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교직을 떠나오니 교사가 얼마나 행복한 직업인지 깨닫고 있다. 학생들 대하고 가르치는 일은 힘이 많이 들지만 성취감과 보람이, 오지 말라고 해도 오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 교육전문직은 이름은 전문직이지만, 사무직이자 서비스직에 가깝다. 다른 사무직 종사자들은 어느 부분에서 일의 재미를 찾는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을 동료에게 말하자, 애초에 일에서 보람이나 재미를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미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찾은 즐거움은 [퇴근하는 즐거움, 주말을 맞이하는 즐거움, 근무지 주변을 산책하는 즐거움]이다. 쓰고 보니, 즐거움의 내용이 빈약하다. 아직 100일 밖에 안 됐으니 그럴 수 있지. 이 즐거움들을 충분히 누리고, 더 많은 즐거움을 찾아야지. 내 복지는 내가 챙겨가며, 힘들 때면 고양이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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