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퍼붓던 저주
"네가 무슨, 일을 할 수나 있겠어?"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판단이었고, 단정이었고, 차라리 저주였다. 그 말에 선뜻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나조차도 그렇게 단정하고 있었기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몸이 약했다.
약하다는 말조차 고상할 만큼 나는 자주 쓰러졌다.
상상이 가는가. 집 앞 슈퍼에 가는 것도 덜덜 떨어야 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 또 실려갈까 봐, 함부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조용한 곳에서도 어지러운데, 하물며 사람 많은 곳에선 증상이 더 심해졌다. 대인기피증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는 멍했고, 가슴은 이유 없이 뛰었으며, 귀에서는 맴도는 소리가 가시지 않았다. 칠판 긁는 소리가 자꾸만 속을 어지럽혔다.
희귀병이라고 했다. 내 마음과 기분을 피폐하게 만든 '그'병 말이다. 변명 같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를 서서히 좀먹어 갔더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또, 건들면 폭발할지도 몰라 긴장해야 하는 시한폭탄이 되어 있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짜증과 신경질은, 주위 사람들도 남아 있지 않게 만들었고. 눈치채 보니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나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쓰러질 수도 있다’는 공포. 늘 나를 따라다니는 그 '공포'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도 함께 공존하게끔 했다.
귀는 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은 차고, 심장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엘리베이터처럼 툭 내려앉았다. 심해지면 장소불문 구토증상까지. 정말 딱 기절했으면- 싶은 심정을 느낀 게 하루에도 수백 번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몸이 작아지는 느낌, 숨을 쉬려 해도 목젖쯤에서 걸리는 듯한 공기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감히 이해한다고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아프다는 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꾀병", "관심종자" 등등의 별명들이 늘 나를 괴롭혔다. 당연하다. 겉으로 봐서는 딱히 표시 나는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세상에 고립되어 버릴 것 같아서. 내가 나를 놓을 것 같아서, 억지로 억지로 노력했다.
누군가 말한다.
“수녀원 가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가지고 어떤 회사에서 좋아하겠니?”
“몸이 약하면 여자애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지.”
“그렇게 예민해서 사회생활 하겠니?”
놀랍게도 그 모든 말은, 학생을 올바른 길로 지도해야 할 교사가 한 말이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비슷한 말을 들어와서, 고등학생쯤에는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짐했다.
‘나도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테다.’
‘나를 아팠다고, 약하다고, 함부로 말한 사람들 입에서, '악!' 소리 나게 만들어 줄테다.’
하고.
그때 내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그런데.
항상 병마와 싸우고, 아프고, 불안하고, 짜증 내고. 그러다 보니,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말이다. 스스로도 일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간호조무사였다. 딱히 대단히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고, 당시에는 제일 무난하게 취업이 되는 직업이어서 선택하게 되었던 거다. (절대 그 직업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때까진 몰랐다.
내가 어떤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할지.
내가 그 선택을 그렇게까지 후회하게 될지.
어떻게 보면 나와의 싸움이기도 했던 그 짧지 않은 세월. 그 순간을 지나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거다.
이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말에 둘러싸여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자, 내 성장에 관한 기록이다. 내가 증명해야 했던 10여 년, 그 시간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들려주려 한다.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 일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