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무조건 숨겨라.

들키면 끝이다.

by 라온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네.”


그 말속엔 언제나 '정말 아픈 거 맞아? 꾀병 같은데.'라는 암묵적 판단이 숨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러했다.








출근 전, 약통을 세 번쯤 확인하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다. 비상용 약은 가장 손 닿는 파우치에. 만일을 대비한 토사물 봉투와 손수건, 두통약과 진정제는 보조 가방에. 그리고, 어지럼이 심할 때 꺼낼 수 있는 단어들도 미리 정해두었다.


“당 떨어졌나 봐요.”
“어제 잠을 못 자서...”

"감기약 좀 먹고 올게요."


잊을 수 없는 '그날' 그때를 기점으로 내 하루는 위장과 연기, 억지와 감추기로 점철되어 가고 있었다.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강제로 배워야 했던 거다.


직장은 아픈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얼굴엔 짜증이 내려앉고, 속닥이는 소문이 화장실 안쪽에서부터 돌기 시작한다.


“쟤, 왜 또 저래?”
“별로 안 아파 보이는데. 그냥 일 하기 싫어서 꾀부리는 거 아냐?”
“저럴 거면 왜 일을 하지?”


다시 ‘불편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숨기고, 감추고, 누르는 데에 내 20대를 받쳤다. 참 필사적으로.


어느 날은, 아침 회의 도중 천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이명이 밀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지기까지 남은 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시스트하던 포셉을 내려놓으며 원장님께 힘겹게 말을 꺼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목소리의 떨림이 내게도 느껴져서 순간 좌절했지만, 날 쳐다도 보지 않는 원장님은 고개만 끄덕끄덕 조아린다. 와중에도, 내 표정을 들키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한 발, 또 한 발, 비틀거리려는 발걸음에 힘을 주어 본다.


여기까지 와서 들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결의를 다지고, 최대치의 근력을 쏟으면서 말이다.


화장실까지 가는 그 몇 초가 마치 온몸을 던지는 스턴트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죽음의 공포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세면대를 붙잡고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평소엔 믿지도 않는 그 '신'을 찾으며, 화장실에서.


아무나 제발 좀.


'제발. 빨리 지나가게 해 주세요. 제발...'


빨리. 이 순간이 끝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매일을 ‘정상’처럼 꾸미며 살았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탈을 쓰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고,

나는 점점 내 안의 목소리를 지워갔다.

말하고 싶었다.


'나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말할 수 없었고, 아무도 속마음은 듣지 못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절규이니, 당연하다. 나는 결국 갑자기 한 번씩 사라지는, '그냥 조금 특이한 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픈 애' 보다는 훨씬 나은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면이 진짜 내가 되어갔다.


아프다, 슬프다, 힘들다는 말은 입속에서 미끄러졌고, 모든 고통은 조용히 내 안에만 고였다. 입을 다물고 웃는 법을 배웠고, ‘괜찮아요’는 나의 자동 응답기가 되었다.


그 가면이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크게 문제없는 직원’이 되었으니까.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고,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숨만 쉬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 속에 섞이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포기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들키지 않게, 실수하지 않게, 티 나지 않게. 얼른 하루가 끝나길.


그렇게 하루, 일주일, 몇 달, 몇 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점점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감정 없는 얼굴이 편해졌고,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이 낯설지 않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도,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음에 또 쓰러지면 어쩌지.

'혹시 오늘 누가 또 눈치를 주면 어떡하지.'


내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속이며’ 살고 있다는 것. 그게 결국 나를 더 병들게 만든다는 것. 그 스트레스가, 한층 더 심한 병을 불러올 거라는 것.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여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자존심'


그래. 난 자존심 하나로 버텨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서면 내 '병' 한테도 지고, 날 얕봤던 사람들 한테도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해가 안 가겠지만, 정말로 그것 하나로 난 그 지옥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거다.


그게 내가 그 시절 배운, 유일한 생존 기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다른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어리둥절 하지만 그땐 그랬다. 들키면 내 세계가 끝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병원을 그만둘 수 없었고, 무조건 감춰야만 했다. 나 자신에게조차 들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