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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딸의   은밀한 사생활

다 지나가니 추억이더라.

 난 딸이 셋이다. 일하는 엄마로 바쁘다 보니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웠다. 세 딸 모두 초등 1학년 입학 후 한두 달만 빼고 가방을 싸주지 않았다. 부탁하지 않으면 숙제를 봐주지도 않았다. 그랬더니 선생님한테 혼나는 게 싫어서 스스로 했다. 비가 온다고 우산을 갖다 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작은 우산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세 아이는 내게 서운할 만도 한데 내색하지 않는다. 대신 난 너를 사랑하고 있고 항상 관심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부당한 말을 들었을 때 아이 앞에서는 엎어버릴 것처럼 액션을 취한다. 그 후 선생님께 전화해 “아이가 어제 상처 받았나 봐요” 하며 잘 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친구들과 싸우고 억울해하면 엄마도 엄청 열 받은 척해준다. “어우, 화나! 가서 혼내줄까?” 그러면 괜찮다고 하지 말란다. '난 항상 네 편이야'를 느끼게 해 준다.     


아이들이 ‘울 엄마는 항상 내 편이야’라고 느낀다고 해서 순탄하게 잘 크는 건 아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사건 사고가 많다. 지금은 지난 일들이라 웃을 수 있지만 가슴이 철렁했던 에피소드들을 말하고 싶다.     


큰아이 수능이 끝나고 설 하루 전날이었다. 내 여동생과 큰딸 나, 셋이서 식탁에 앉아 만두를 빚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할 말 있어  00이랑 사귀어" 순간 정적이 흐른다. 내가 놀라 말했다. “응? 뭐라고? 누구랑 사귄다고? 00이? 중학교 친구 그 00이?” 00이는 여자 아이다. 큰딸의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다.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쭉 연락하고 만나곤 했다. 솔메이트란다.  순간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돌아간다. 어찌 반응해야 할까? 이게 미쳤나 하고 소리쳐야 할까? 그때 애들 이모가 소리친다. “야! 너 이게 설날 만두 빚다 말고 할 소리야?”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언제부터? 너 남자 친구 있었잖아 레즈비언이야? 스킨십은 스킨십도 있었어?” 00이랑 있으면 편하고 속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단다. 00이는 여자가 좋다고 했고 다행히 스킨십은 없었다고 했다. 그때 감이 왔다. 요것들이 고등학교 3년 동안 힘들고 의지를 하다 보니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되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쿨하게 “그래 사귀어라” 했다.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둘만 알라고 했다.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네가 의지가 되고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면 그리 하라고 했다.     


큰딸에겐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난 충격이었다.      


독립적으로 키운답시고 너무 방임했나? 자괴감과 함께 지난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떠올랐다. 학교가 밤 11시에 끝나거나 버스 다니기 전에 학교를 가면 등하교를 시켜야 했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냉방병으로 컨디션 조절하느라 병원 데리고 다니며 뒷바라지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수시로 붙었다고 한시름 놨는데.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 듣자고 애지중지 키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큰아이는 전학 오기 전 초등학교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00이가 레즈비언인지는 모르겠다. 큰아이는 그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내 짐작에 아마 00이도 레즈비언은 아닌 듯하다.     


옛날 사진을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둘째는 꿈이 없다. 고등학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자퇴하고 싶다고 했다. 한 고개 넘으니 또 한 고개다. 중학교 때 전교 1등도 했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다. 공부가 하기 싫으니 학교도 재미가 없단다. 게다가 코로나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니 학교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인터넷에 ‘자퇴’를 검색했다. 대안학교도 알아봤다. 유튜브를 보니 자퇴한 아이들의 경험담도 있다. 확고한 꿈이 있거나 학교폭력을 당해서 교우관계에 트라우마가 있지 않는 한 자퇴하지 말라고 한다.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가는 것도 힘들다고.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출석만 잘하면 졸업장을 주니 웬만하면 다니라고. 중졸로는 아직 사회에 나가면 힘들다고.     


나의 교육관은 '하고자 하는 놈만 밀어준다'이다. 이 생각이 아이에게 전달된 것이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목적이 없으니 공부가 하기 싫은 거였다. 대학 나중에 가도 되고 안 가도 좋으니 꿈을 찾아보라 했다. 지금 열심히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건 아직 꿈이 아니란다. 딸과 타협했다. 공부하라고 안 할 테니 졸업만 하자고 했다. 공부가 억지로 되지 않음을 안다. ‘때가 되면 하겠지’ 기다려 주려 한다. 고3이 되기 전까지도 꿈을 못 찾으면 자퇴를 시키고 대안학교를 보낼까 고민 중이다. 둘째 딸과의 일은 나의 엄포로 마무리했다.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돈 벌어 와 알바 던 뭐든 그냥 노는 꼴은 못 봐.”    

 


셋째는 아직 사춘기다. 방문을 닫고 혼자만의 세계를 즐긴다. 방문 앞에 방이 붙었다. '노크 5번 하고 들어오기' 난 착한 엄마가 아니다. 그냥 들어간다. "벌컥, 자냐? 벌컥, 뭐해? 너도 거실 나올 때 노크 5번 하고 나와!" 막내는 가끔 나에게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생 짜증을 부린다. 그러면 옆에 있던 언니들이 한 마디씩 한다. “야, 버릇없게 어디서 엄마한테 신경질이야.” 푸하하. 너무 웃긴다. 자기들은 더해놓고 “야! 너넨 더했거든” 내가 말한다. 자꾸 반복되기에 막내에게 한마디 했다. "나한테 이렇게 막하는 사람 너뿐이야 아무도 엄마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지 않아" “엄마 미안해”      


아이들과 카톡을 자주 한다. 그런데 ‘엄마!’ 하고 불러놓고 다음 이야기가 없으면 가슴이 철렁한다. 속으로 생각한다. ‘왜! 또! 무슨 일이지?’     


아이들이 어릴 때는 먹이고 재우고 아프지만 않게 키우면 되었다. 그러나 점점 아이들이 커갈수록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다. 딸 셋을 키우면 엄마 노릇 세 번째니까 쉬울 것 같은데 아니다. 성격이 다르다 보니 쉽지 않다. 셋 다 성별이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여긴다.     


인생 사는 것도 처음이고 엄마 노릇하는 것도 처음인지라 시행착오가 많다. 순간순간 힘들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친구들이 말한다.  "그럼 넌 늙잖아!" 늙는 건 무섭지 않다. 대신 원숙해지겠지. ‘난 열심히 사는 사람이니까 지금보다 나쁘지 않을 거야 분명 성장해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나중에 쭈그렁 망탱이 할멈이 되었을 때 아이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질 때도 있겠지만. 난 앞만 보려 한다.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날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면 옛날이야기하며 웃을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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