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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Oct 09. 2024

누구신지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고마워요.

희미한 사람들에게

퇴근길에 회사 근처에 있는 백화점 식품 코너에 종종 들른다. 운때가 맞으면 신선 식품을 대폭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영업 종료 시간에 가까워지면 안 팔린 나머지 물건을 떨이로 싸게 파는 모양인데 주머니 사정이 그렇고 그런 월급쟁이는 정가에서 40~50% 할인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으니 돈을 쓰고도 이득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큼직한 자반고등어 두 마리에 1만 2천 원, 초밥 두 팩에 1만 8천 원. 떨이로 파는 생선을 살 듯 말 듯 고민하다가 결국 제자리에 내려놓으면 “손님, 한 팩 더 가져가세요! 하나 더 드릴게.” 뒤통수에 대고 다급히 외치는 직원의 목소리에 못 이기는 척 되돌아와 입술을 종그리고 물건을 카트에 담는 재미도 있다.


오늘은 근무를 마치고, 블루베리와 자두 떨이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는데 반대편에서 “초밥 가져가세요! 한 팩 더 드려요. 떨이! 떨이!”라는 판매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청이 어찌나 우렁찬지 마치 부메랑처럼 백화점 식품 코너를 한 바퀴 돌아오고도 남을 만한 음파였다. 백화점 3층 전체가 쩡할 정도라 나는 피리 부는 소년이 부는 피리 소리에 홀린 생쥐처럼 고성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회 두 팩에 2만 5천 원. 아들이 좋아하는 과일만 싸게 살 생각으로 들른 건데 막상 진열된 회를 보니 자태가 심히 도발적이라 고민이 되었다. 생선살의 빛깔이 투명하고, 윤기가 흘러 신선해 보이는 데다가 육질은 탱글탱글해 보여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냉기가 위아래로 쏟아지는 진열칸에 손을 뻗어 내가 좋아하는 연어회 팩을 들어 유심히 훑어보다가 내려놓고, 남편이 좋아하는 우럭, 광어회가 섞인 흰 살 생선 팩을 잡으려고 하는데 낯선 손이 무심히 끼어들었다.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네 번째 손가락에 ‘참깨’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하얗고 단정한 여자의 손.


나는 어차피 이것을 살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라서 ‘오늘 반드시 이것을 먹고자 마음먹고 백화점에 온 이’에게 기꺼이 양보할 마음을 먹고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핑계 김에 ‘군것’에 돈 쓸 생각을 타의에 의해서라도 멈추었으니 잘 되었다 싶었다.


“어? 맞죠? “

우럭, 광어회 세트 팩을 그러잡은 여자가 멈칫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훑으며 활짝 웃었다. 여자는 윤결이 도는 고운 피부를 가진 덕에 민낯에 가까웠음에도 발그레한 볼이 돋보였고, 웃을 때 드러난 치아가 석류알처럼 가지런해 보였다.


“아……누구신지?”

“저 기억 안 나세요? 2년 전인가? 일 때문에 찾아뵈었었는데. 두 번이나 갔었는데 기억 못 하세요? “

여자는 목이 길쭉한 미인형으로 생긴 데다 상당히 활기차고 상냥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쉽게 각인될 만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본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대해 의아한 표정으로 상당한 의구심을 드러내며 나의 기억을 재생시키기 위해 그녀는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눈을 반짝이며.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머릿속의 온갖 서랍을 쑤석거려 뒤져보아도 안면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당황하고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알을 들들 굴렸다. 회 진열대 위아래로 냉기가 샤워처럼 쏟아져 맨살이 드러난 데는 오돌오돌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으나 나의 가슴은 당혹감에 덜컹거리고 끈적한 식은땀이 전신에 흐르는 듯했다.

회사에서 업무차 만난 사이라면, 서로 얼굴을 마주했을뿐더러 연락을 한두 번한 게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깜깜인지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죄송해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서. 어쩌죠?” 나는 민망하고 상대에게 미안해서 겸연쩍이 웃어버렸다.

“괜찮아요. 당연히 기억 못 하실 수 있죠. 장 보러 오셨나 봐요.”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플라스틱 장바구니 속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이의 성격이 어찌나 명랑하고 거침없는지 나만 괜찮다면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며 함께 장을 볼 기세였다.

“네. “


실지로 나는 모르는 사람과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하고, 꼬리가 길게 늘어진 업무의 영역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해서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짧게 답하니 그녀는 알아들었다. 다행이었다.

“그럼 장 잘 보고 들어가세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목례를 건네고는 포장된 회를 장바구니에 넣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내가 하는 일은 사적인 영역의 폐쇄적인 일이라서 오늘 같은 식으로 이전의 민원인과 직원으로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못 본 척 지나간다.

회사가 평상시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위치한 연유인지 길에서, 요가원에서, 카페에서 이전의 ‘민원인’들을 본 적이 있다. 나의 근무복(전투복)과 일상복의 차이는 거의 건어물녀(예전 일본 드라마)에 가깝다. 그래서 휴일에 그들을 만날지라도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나를 ‘절대’ 알아볼 수 없다.

오늘 같은 평일 저녁이 문제다. 서로 눈이 마주쳐 알아보는 것도 거북한데 상대는 나를 아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날 때, 정말 마음이 불편하다.


서로 간 경계가 명확하고, 사회적인 거리가 뚜렷한 사이라서 그런 걸까? 회사일을 투명한 가방에 넣은 채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그런 걸까?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같은 버스에 탄 사람들의 얼굴을 무심히 한 명씩 바라본다. 이 많은 사람, 내가 모르는 이 사람들의 얼굴을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안경을 쉼 없이 콧잔등에서 올려 쓰는 학생의 얼굴과 헝겊 장바구니에 잔뜩 담긴 푸성귀를 무릎에 내려놓고 무심히 창문을 보는 아주머니의 얼굴과 넷플릭스 영상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아저씨의 얼굴을.

기억을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무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중에 누구라도 나에게 시비를 걸거나 대뜸 화를 내며 때린다면 난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애쓰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 백화점에서 만난 그 여자가 기억이 안 난 이유는 그녀가 내게 무해한 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으로 마음에 작은 불빛이 켜졌다.

내가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중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내게 돈을 던졌던 여자의 얼굴과 나의 질문에 간단한 대답조차 안 했던 남자의 얼굴, 사무실 테이블 의자를 발로 걷어찼던 남자의 얼굴,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해서 고함을 치고 떼를 쓰는 여자의 얼굴. 이런 얼굴들이다.


아, 그래서 나는 오늘처럼 내 기억 속에 전혀 없는 얼굴을 한 사람과 희미한 안개처럼 사라진 얼굴을 한 이들에게 고맙다.

화가 나고 조바심이 나더라도 인내하고 예의를 지켰던, 나를 한 사람으로 정중히 대해주었던 그들의 얼굴을 나는 기억 못 하지만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서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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