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침에 인공눈물 대신 안약 넣고 있니?"
"아니요~ 그건 렌즈 빼고 넣는 약인데요..."
"아니! 아침에 드림렌즈 뺄 때 말이야! 인공 눈물 어디 갔어?"
"..."
"인공눈물 안 넣고 렌즈 빼고 있는 거야?"
"..."
하... 출근준비로 바쁜 아침부터 아이를 향한 잔소리 융단폭격이 또 시작되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큰 눈만 끔뻑끔뻑 감았다 뜨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진다.
자고 일어나 드림렌즈를 뺄 때 눈에 상처가 날 수 있으니 인공눈물 한 방울씩 넣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듣고 잘 실행하던 아이였는데, 안약 처방 후 인공눈물을 넣지 않고 있다. 아이는 두 가지 프로세스를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내가 아이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던 것일까?
어제도 남아 있는 식염수를 몽땅 짜서 버리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 아이를 다그치지 말자, 혼내지 말자, 차분히 잘 말해주자 다짐을 했었다. 그 짧은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 아침 아이에게 또 큰 소리를 퍼붓고 있는 내 모습을 보자니 자괴감이 든다.
하루의 시작. 누구보다 기분 좋게 행복하고 감사하게 시작하고 싶은 아침이다.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오늘도 새 날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외치고 일어났다.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아름다운 출발이었다. 첫째 아이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5학년부터 사춘기가 시작된듯한 아이지만 6학년이 된 지금까지 말대꾸, 반항 한번 없는 순한 아이다. 엄마인 내가 봐도 착한 아이인데 사춘기가 되고 엄마의 큰소리에 순한 소 마냥 큰 눈을 끔뻑거리고 있으면 또 그것만큼 답답한 게 없다.
변명을 하든지, 말대꾸를 하든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죄지은 사람처럼 주눅들어 있는 아이 모습에 또 화가 치민다.
사무실에 도착해 일을 하며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낼 일이었을까? 아이에게 좋게 말할 수는 없던 걸까? 이쯤 되면 공격받는 아이보다 공격하는 내가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커진다.
아이의 사춘기가 문제가 아니라 갱년기에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는 내 감정이 문제인가 싶어 자괴감은 더 커진다.
부모님의 딸로 시간을 보냈고, 남편을 만나 아내라는 이름을 얻었고, 아이들을 낳아 엄마가 되었다. 딸, 아내, 엄마에 더불어 월급 받는 회사원에, 이렇게 글을 쓰는 무명작가역할까지 자처하고 있는 나의 역할은 꽤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게 엄마역할이라 느끼는 요즘이다.
다들 좋은 엄마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만 같은데 나는 "엄마"라는 이름이 왜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이는 사춘기를 겪으며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유아기 엄마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아이가 커 가듯 엄마로서의 나도 함께 커야 하는데 나는 아직 어린 엄마인가보다.
"엄마 사표 내고 싶어!"
누구에게 사표를 내 던져야 하는 걸까? 들어주는이 없는 공허한 외침은 허공을 맴돌다 허무하게 다시 나의 마음에 와서 꽂힌다. 나는 엄마 자질이 부족한 걸까? 나는 나쁜 엄마인가? 나 같은 엄마가 어디있담? 나는 정말 못난 엄마야...
아침부터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와서 엄마로서 부족한 나를 향한 질문은 아무런 해답 없이 결국 자책으로 나의 마음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다.
'엄마, 엄마는 우리 삼 남매 키울 때 어땠어? 안 힘들었어? 엄마는 갱년기 시기를 어떻게 보낸 거야? 나 사춘기 때 엄마도 힘든 순간이 있었겠지? 엄마는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낸 거야? 응 엄마?'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가장 무겁게 느끼는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도 바로 나의 엄마다. 하... 도대체 엄마란 무엇이길래 이 나이 먹도록 어려운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말인가.
하필 스마트폰에는 10년 전 오늘이라며 해맑게 웃는 아이와 행복한 미소의 내가 있다. 저때는 분명 아이가 빨리 커서 이 힘든 시기가 지나갔으면 하고 바랬을 텐데... 그렇게 10년이 지났는데 왜 나는 또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하루다.
그래! 사표를 던지긴 누구에게 던져! 엄마라는 이름이 버린다고 버릴 수 있는 이름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해답은 내 안에 있고 그 해답을 찾을 사람도 나다!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할 사람도, 아이가 바르게 커갈 수 있도록 안전한 울타리가 될 사람도 바로 엄마인 나다. 어쩌면 아이보다 내가 더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커 가는데 나만 유아기 엄마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크자. 아이와 함께 엄마도 커 보자. 너는 사춘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갱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같이 커 보자.
"이 모든 게 호르몬 탓이야!!!!"
폐경이 다가온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무색하게 생리 중인 여자는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울다 웃다 감정 널뛰기를 하며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몹쓸 호르몬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