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다지도 뚜렷한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알고 있지 못하다.
목련이 지는 계절에 나는 대문 앞에 있는 턱 위에 하얀 목련 꽃잎 두 개를 놓았다.
그것은 마치 봄이 벗어놓고 간 두 개의 신발 같았다.
가지런히 정돈해 놓자마자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던 애수라 할 만한 그것을,
나는 너무나 고와서 털어내기 어려운 모래처럼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눈물처럼 남긴 봄의 흔적이었나보다.
땅에 떨어져 짓밟힌 목련의 꽃잎은 순결한 백색이 아닌 포도를 갈색으로 더럽히는 얼룩이었다.
그럼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서성인 것은.
하얀 새가 모두 날아가 버린 목련 가지에는
꽃 대신 '날아감' 그 자체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을까.
약간의 서글픈 아쉬움을 남기고 -
대문 앞에서 천천히 말라가는 부드러운 꽃잎은
그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있지만.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은
보았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순간에 이미 사라져버린다.
나는 어제보다. 혹은 일 주일 전보다 이처럼 아주 오래 전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이미 그 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가슴에 품고 있기에, 지금의 삶이란 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오만하고 나약한 아이의 가슴 속에는 이미 완성된 세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관용, 절제라는 것을 그것에 첨부할 뿐이지만 - 그렇게 두 개의 꽃잎을 댓돌에 올려놓는 세계. 짓밟힌 목련꽃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세계. 따뜻한 온기를 품은 벽돌담에 기대어 '새 같구나' 하고 목련을 관찰하던 세계는 이미 확고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의 나는 때때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갈구하며 살아야할지를 모를 때가 있다. 그저 멍한 것이다. 단지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이 망연한 자신에게 강력한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쫓기듯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은 아닐까. 싫어도 달려나가는 이것이 마치 고삐처럼 자신을 죄며 그것에 아무런 이의없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을 '목표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싶을 때가 있다. 일어나기 싫은 자신을, 살아있는 가슴이라고는 조각만큼도 참여하지 않는 수업을 듣기 싫은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 그래서 길들이는 것이 '참을성과 의지'라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순간마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끝없는 용서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런 남루하고도 지리한 삶을 감수하는 자신조차 계속해서 용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내일이 있는 한 또다른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눈알을 잘 익은 바나나처럼 느끼게 될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바나나 껍질을 주워먹던 부랑자에게 몇 푼의 돈을 건네려던 나를 지하철 문이 가로막았고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이 몇푼의 돈을 쥐고 있는 자신의 허약함에 대해 - 그리고 오늘 바나나 껍질을 주워먹는 것으로 내일 바나나 껍질을 주워먹을 자신을 이어나가는 것에 대해. 나는 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생. 나는 이 한 단어를 입술 안에 품기가 이토록 버겁고 몸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면서도 떠날 수 없었다. 이게 뭐지?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었고 대답 대신 맑은 물만 헛구역질처럼 치밀어 올랐다.
꽃잎이 지고 그것을 짓밟으며 쓰레기차가 지나가고 정기적으로 사람들은 쓰레기를 내놓고,
아이는 웃다가 넘어져서 운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하마비가 있다.
신하들은 이 비가 있는 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야한다. 어전이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바로 이 비 앞에서 학생들은 셔틀버스를 탄다. 신하들은 말에서 내리고 학생들은 버스를 탄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곳에서. 그것을 알고는 조용히 웃는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그리고 셔틀버스를 타던 학생들을 대신하여 이곳에 서 있을 존재는 누구인가.
그렇게 생은 흘러 마침내 마지막 장은 어떨 것인가. 나는 꼭 그 날처럼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듯 싶다. 그런 평안은 축복이기에. 가벼움은 안식이기에. 더이상 내게 내일이 없어, 용서도 필요 없는 마지막 순간. 가지를 흔들지 않고 하늘로 날아간다. 꽃잎은 땅에 떨어질지라도 존재는 '날아감' 그 자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