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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삶 Oct 12. 2022

걸어서 폭풍 속으로

폭풍을 다스리는 해답은 이미 내 맘 속에 있다.

폭풍 전야는 가장 평화로운 법

3월 1일이 되었고 인턴들은 모든 원장님들에게 근무 시작을 알리는 문자를 보냈다. 공식적으로 일을 시작한다는 느낌에 평상시에 연락하던 교수님들, 원장님들께도 내 거취 관련해 연락드렸다. 6년이라는 학생 시절을 거치고 국가고시 끝나고 오랜만에 연락하니 이제야 진짜 사회인이 된 느낌이라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수많은 응원 메시지를 받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내 앞에 새카만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 멘탈은 폭풍 속에 내던져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나의 모든 입원 기록지, 경과기록지는 눈물로 얼룩져있다. 환자가 입원해서 문진을 하고 그 내용을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브리핑하고 각각 기록지를 작성하고 검사를 맡은 후 틀린 부분을 알아서 찾아내서 완벽해질 때까지 수정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모를 때, 그러면서 일이 정신없이 쏟아질 때였다. 환자가 퇴원하면 퇴원 기록지도 써야 했고, 병동에서 요청하는 내용들을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전달하고, 처치가 필요한 환자들 상태를 살피고, 틈틈이 다시 확인하러 가고 이 또한 선생님들께 보고해야 했다. 물론 전자 의무기록(EMR) 시스템상에도 이 모든 기록을 완벽하게 남겨야 했다.

오후에는 병실에서 침 치료하는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며 기다렸다가 발침을 했다. 난 여전히 저녁 라운딩도 돌아야 했고 끝나면 내일 아침용 브리핑지를 준비하며 혈액, 소변검사나 영상 검사 결과도 추가했다. 다음날 아침에 원장님께 제출하는 진짜 브리핑지는 더 잘 만들기 위해 전날 밤에 환자들에게 물어볼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게 하루 마무리 일과였다.

 

속도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면서 몰아치는 일을 쳐내다 보니 실수가 계속됐다. 계속 틀리니 자존심도 상하고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도 모르게 났다. 특히 다른 인턴 동기들에 비해 내가 턱없이 부족한 것 같고, 남들한테 피해 주는 걸 싫어하는 내가 짐이 되는 거 같을 땐 너무 부끄러웠다. 웬만하면 털고 일어나는데 자괴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울함까지 나를 집어삼키면 눈물 속에 갇히게 되더라. 타자 하나하나 칠 때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고 남들에게 우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병동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눈물 감옥에서 나를 꺼낸 후 다시 의국에 올라갔다.


각자 느끼는 불행의 크기가 다르기에

3월 6일 갑자기 동기 인턴 선생님이 그만두겠다고 했다. 3월 1일부터 이틀간 폭풍 속에서 정신 못 차리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4일 저녁에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레지던트 선생님의 지시로 인턴 동기들이 내가 작성한 경과기록지, 입원 기록지를 한 번 봐준 후에 선생님들께 확인받기로 했다. 그러던 중, 4일 저녁에 날 봐주던 인턴 동기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 좀 해!!


당시 의국에는 나, 동기, 레지던트 선생님 총 3명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선생님도 깜짝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동기가 내가 쓴 경과기록지를 한 번 봐준 후 헷갈리는 부분을 메모장에 적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리쳤다. 정적이 의국을 덮쳤고, 선생님이 동기를 내려보내며 선생님과 단 둘이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상하리만치 정신이 또렷해졌다. 우선 동기가 소리를 지른 이유가 뭘까? 소리를 질렀어야 하는 상황이었나? 내가 잘못을 한 건가? 오늘 내가 이 동기한테 잘못한 게 있는지 곱씹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억울함과 슬픔이 뒤섞여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동기가 나한테 소리를 지른다니?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을까? 이 병원에 잘못 온건 아닐까? 먼저 들어온 3명의 동기들보다 내가 아래에 있다는 생각이 심적으로 나와 그들을 분리시켜놨고, 3명과 달리 난 타지 사람이었기에 낯선 환경에서 마음 기댈 곳 하나 없다는 사실이 그 순간 더 크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얘기해보았다. 선생님은 난 교육 안 시켜도 알아서 잘할 줄 알았고, 오히려 일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다고 했다. 의욕이 없어 보여서 더 혹독하게 대한 것도 있다고 했다. 남에게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내 성격이 문제였던 걸까.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과 괴리감이 생길수록 나의 자존감은 점점 내려갔다.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마땅찮았다. 동기도 어렵고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실수가 반복될 뿐. 난 잘 가꿔지고 있는 정원에 굴러들어 온 돌멩이 같았다. 제대로 뿌리도 못 내릴 거고 다른 식물이 자라는 걸 방해만 할 것 같았다. 매일 밤 울면서 내일은 꼭 그만두겠다고 다짐을 하다가 이런 일을 겪으니 더 강렬하게 퇴사하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이런 내 속 얘기를 선생님께 말해봤다.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눈물샘은 터졌고 턱 끝에 맺힌 눈물이 길게 흘러내려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눈물도 전염이 된다고 하던가. 선생님도 이런 날 보면서 같이 울었다.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한 번 더 날 강타했다. 겨우 막고 있던 눈물보가 완전히 터져서 의국은 잠겨버렸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후 마음속 지독한 어둠은 조금 걷혔다. 다시 잘해보고 싶은 욕구가 불타올랐다. 나 스스로도 떳떳해지고 싶었고 선생님에게도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더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속에 품고 있던 퇴사 종이는 찢어버렸다. 다시 시작해보자. 이왕 시작한 김에 끝을 봐보자. 포기하지 말자.


이틀 뒤, 그 소리 지른 동기가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정말 궁금했다. 선생님과 새벽 1시 넘도록 얘기한 날 이후로 난 안정화되고 있었기에 무엇이 그 동기를 또 힘들게 한 건지 모르겠더라. 병원은 초 비상사태였다. 3월 첫째 주에 인턴이 그만두겠다고 하니 각 연차의 장인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동기와 상담했다. 우리 연차도 그 동기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생각했던 수련의의 삶이 아니다' 라며 나가겠다는 의지를 굳히는 듯했다. 어쩌다 보니 그 동기가 인턴 중에서도 제일 힘든 인턴이 되었다. 그간 심적 고통은 내가 더 컸던 거 같은데 말이다.


토요일에 동기가 퇴사 선언을 하고 난 후, 3일 정도 그 동기한테 생각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다. 우린 동기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일 동안 그 동기의 몫까지 나머지 3명이서 처리하기로 했다. 동기는 당직실에서 3일 동안 쉬면서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면담을 했다. 당직실에선 감히 그 동기 앞에서 우리 셋은 일이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애써 밝은 척했다. 최대한 병동에서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쥐어짜 내 보았다. 누구 하나 안 힘든 사람 없겠지만 지금은 나가겠다는 동기가 제일 힘든 사람이고, 우린 그 동기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한 명이 나가는 순간 일은 바로 늘어날 거고 더 고되질 걸 알고 있었다. 또 동기가 나가면 우리에게도 책임을 물을게 뻔했다.  

다행히 의국장 선생님의 설득으로 동기는 다시 같이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담당하는 원장님과를 재편성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일단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래. 우리 네 명 다 같이 레지던트까지 함께 할 수 있겠지? 정말 격동의 3월 첫째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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