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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삶 Oct 30. 2022

선생님,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나의 첫 환자들의 퇴원

정들었던 A 환자분과 B 환자분이 동시에 퇴원했다. 


A님은 501호 제일 창가 쪽에 계셨던 '까다로운 할아버지'였다. 아침 라운딩을 가면 늘 검은색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계셨고 맞은편 자리 환자분과 오늘 무슨 치료받았는지, 본인 담당 원장님들 치료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그들의 주요 대화 주제였다. 아침 라운딩하고 나면 맥이 다 빠졌는데, 아침마다 항상 같은 대답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조금만 뒤척여도 허리 통증이 심하다고 하셨다. 깜깜한 병실에서 펜라이트를 켜고 A님을 깨우는 것 자체가 환자분이 자세를 고쳐야 해서 허리에 더 안 좋은 건 아닌가, 스트레스받으시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501호에서 A님에게 허리가 어떤지, 밤에는 잘 주무셨는지 여쭤보고 '똑같아요'라는 답변을 듣고 나오면 나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말씀을 더 안 해주실까? 너무 답답했다. 제가 환자분 잘 안되라고 여쭤보는 게 아니지 않나요. 마음속으로는 궁시렁대 봤지만 나는 결국 한낱 인턴 나부랭이고 진짜 치료를 해주는 원장님은 또 아침에 바로 만나기 때문에 아침에 굳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이해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 저녁 두 번 라운딩을 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라운딩의 순기능엔 인턴과 환자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걸지도?


어느 날 아침엔 허리 쪽을 건드리면 더 아픈 것 같다고 도수치료는 안 받겠다고 먼저 여쭤보기도 전에 선언하셨다. 아침에 들은 의외의 문장에 적잖이 놀랐다. A님은 한 달을 꼬박 입원 치료받으시는 중이었다. 매일 차도가 없다고 한숨만 쉬시다가 언젠가부터는 옥상에서 몇 바퀴씩 걷고 뛰고를 반복하셨다. 갑자기 좋아졌다고 하시는 거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요? 정말 나아지신 거예요? A님을 의심할 수도 없고, 내 눈을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치료는 계단식으로 이뤄진다던데, 이렇게 갑자기 된다고? 

A님은 그 후 며칠이 지나서 퇴원하기로 원장님과 상의했다고 하셨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시면서. A님도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너무너무 잘돼셨어요, A님이 열심히 치료받고 운동하셔서 이렇게 잘 나은신거죠. 선생님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내 손을 잡고 A님은 말씀하시고 떠나셨다. 

 

B님은 아침에 라운딩을 가면 진지하게 화를 내셨다. 저 깨우지 마세요. 

라운딩 때 문전박대를 당한 경우는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거부하는 분은 처음이었다.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하면서 라운딩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어차피 저녁에도 오는데 아침에는 굳이 안 깨워도 되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답을 하기 힘들긴 했다. 그렇긴 하지. 그러게 왜 라운딩을 두 번 시키시나? 하지만 난 인턴이고, 위에서 시키는 건 따라야 한다. 최대한 B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라운딩을 살살 돌기로 했다. 


병실 커튼을 살살 걷고 B님 이름을 조용히 불러야지. 무엇보다도 아침 배식시간에 맞춰서 제일 늦게 B님 병실에 가는 게 포인트였다. 어깨 통증 때문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매일 밤을 설치는 분이었다. 어떤 자세에서 어깨가 제일 아픈지 여쭤보면 그걸 말해야 아시냐는 표정으로 그냥 다 아파요 이런 대답으로 일관하셨다. 어떻게 해야 B님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하필 A님과 B님이 같은 원장님 환자분들이어서 왜 이 원장님은 이런 환자분들만 받냐며 원장님도 원망해보기도 했다. 


어느 날, B님이 치과 진료를 받는데 예약일에 갔더니 사람이 많아서 진료를 늦게 보고 돌아오신 날이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라 병원 진료로 외출을 가도 2시간 이내만 허용되던 때였다. 그래서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도 B님께 전화하며 어디쯤이시냐며, 이제 돌아오셔야 한다고 외출 시간 엄수 주의를 계속 드렸다. B님은 시간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 하는 분이셨다. 어쩔 수 없이 기존보다 3시간 정도 늦게 돌아오셨지만 내가 원장님께 잘 설명해드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내게 연신 감사하다고 하셨다. 제가 허락하는 일은 아니긴 한데요... B님은 내게 강한 신뢰를 보이며 그다음 날 라운딩부터는 눈빛을 빛내며 날 맞아주셨다. 퇴원하는 날에는 내 이름을 꼭꼭 외우겠다고 말씀하시며 가셨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인턴 시작부터 함께 했던 A, B 님들이 동시에 퇴원하셨다. 라운딩 때문에 처음에 고생하던 것도 생각나고 괜히 쓸데없이 환자분들과 기싸움을 오래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며 시원섭섭하다. 인턴 두 달 차, 담당하는 환자가 퇴원한다고 이렇게 섭섭한데 원장님들은 섭섭을 넘어서 쓸쓸해하시려나? 아냐, 나 혼자 너무 감정이 롤러코스터 타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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