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대학 대신 방송대학 다닌다

영어영문학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by 라트

2020년은 나의 첫 번째 육십갑자 마지막 해였다. 지난 60년간 살면서 나는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내가 그릇이 작아서 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니고 재벌이 된 것도 아니지만 나는 더 이상 욕심이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만족한다.


이제 다시 시작되는 두 번째 육십갑자를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 나섰다.


자주 가 보지는 못 했지만 언젠가 한 번 가보았던 카페 거리로 발 길이 옮겨졌다. 오랜만에 와 본 곳이어서 어느 카페로 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무엇엔가 홀려 카페의 문을 열고 발을 옮겼다. 내가 들어간 곳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이면서도 어딘지 모를 섹시함까지 갖춘 와인바였다.


시간이 느지막한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와인바의 실내는 손님들로 앉을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두리번두리번 자리를 찾고 있는데 마침 바텐더 앞 쪽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 손님이 앉았던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세련된 이미지에 지적인 면모까지 갖춘 미모의 바텐더는 나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무엇을 주문할 것인지 묻는다.


나는 잘 알고 있는 와인도 없었던 터라 이 와인바에서 제일 많이 찾는 주종으로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녀는 나에게 한 잔의 칵테일 와인을 준비하여 주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요염해 보이는 술잔에 담긴 연초록색의 술과 함께 데코레이션으로 들어있는 작고 깜찍한 빨간 과일이 나의 기분을 센티멘털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녀가 권한 술을 가볍게 입술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흡입하였다. 살짝 단 맛이 나는 것이 마시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 오늘 나의 기분에 꽤나 어울리는 술이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을 하다 보니 나의 정신이 약간 기분 좋은 정도로 혼미해 짐을 느꼈다.


이제 시간은 흐르고 손님들도 한 명 두 명 자리를 비우고 카페 안은 어느 정도 한적해졌다. 바쁘게 일을 하던 그 녀도 이제 한 숨을 돌렸다는 시늉을 하며 내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 녀가 좋은 술을 추천해 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내가 술을 한 잔 사겠노라고 하였으며 그 녀도 흔쾌히 나의 호의를 받아주었다. 그 녀는 나에게 추천해 준 주종과는 다른 술을 한 잔 가지고 왔다. 심플한 잔에 담긴 담백한 하얀색의 와인은 어딘가 모를 전문가 만이 마실 수 있는 그야말로 스페셜한 주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녀와 나의 대화는 오늘의 날씨로 시작하여 점점 이야기의 주제가 깊어지다가 각 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갔다. 그 녀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에 미국에서 파견 나와 근무 중이던 잘 생기고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2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각자의 성격차이를 인정하고 이혼을 한 후에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하여 이곳에 와인바를 차려 운영한 지가 약 1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업을 한다는 기분에 흥분되어 과거의 생활을 잊고 새로운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왔는데 1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삶의 매너리즘에 빠져 무언가의 또 다른 새로움을 찾고 있다고 하였다. 함께 대화를 하다 보니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나는 올해로 첫 번째 육십갑자를 끝내고 무언가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 녀는 내 나이가 육십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자신이 처음 나를 보았을 때는 40대 중반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나는 나의 나이를 젊게 봐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사실 다음 달에 프랑스 여행을 할 계획인데 프랑스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하였다. 나의 말을 들은 그 녀는 자신이 지난번 프랑스 생활을 하면서 정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자신도 다음 달에 프랑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프랑스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그 녀는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지 말고 처음부터 함께 가자고 제의를 해 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프랑스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평소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글을 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은 다시 밝았다.


이제 다시 현실이다. 어제 밤늦게까지 고민했던 두 번째 육십갑자 보내기의 생각은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젊은 여인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해 볼 수도 있고, 젊을 때에 해 보지 못 한 음악을 시작하여 뮤지션이 돼 볼 수도 있고,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을 공부한 후에 변호사가 되고 약자를 변호하는 일을 하며 명성을 쌓아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지난 육십갑자의 삶의 경험을 통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을 새로 시작하여 재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첫 번째 육십갑자 마지막 해인 2020년에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고 현재 모든 수업과 시험을 마무리하여 졸업예정자 신분이며 2022년 2월 23일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2022년 1월 16일 자로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앞으로 2년 후에는 또 다른 학과에 편입할 예정이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는 24개 학과가 있으니 한 학과를 2년씩 다니면 모든 학과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4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 내 나이는 108살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 중이다. 아직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는 철학과, 심리학과, 역사학과 등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내가 108살이 되기 전에 이러한 학과들이 개설되기를 희망한다.


이숙자 작가님은 노인정 대신 서점에 간다고 하신다. 나는 노인대학 대신에 방송대학 다닌다.


카페의 여인은 다른 글의 소설 파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커버 이미지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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