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으면 표시가 나는 일
이렇게 정리가 된 후에 본격적인 설거지가 시작된다. 설거지를 하기 전에 이러한 기본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싱크대 볼에 쌓여 있는 식기류만 설거지를 하면 설거지가 끝났을 때에 무언가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본격적인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다. 앞치마 두르기와 고무장갑 끼기가 귀찮아서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맨손으로 그대로 설거지를 하면 설거지가 끝난 후에 상의가 물로 펑 젖어 있어서 매우 짜증 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무장갑은 반드시 끼고 설거지를 한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반복하여 설거지를 하게 되면 주부습진이 걸리기 쉽다.
설거지를 하는 데도 순서가 있다. 먼저 접시류를 설거지하여 물 빠짐 용기의 가장자리에 배치하고 다음에 수저와 작은 그릇류를 먼저 설거지하고 다음에 큰 그릇류를 설거지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냄비나 솥, 프라이팬을 설거지한다. 이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큰 그릇류를 먼저 설거지하여 물 빠짐 용기에 배치하고 나면 물 빠짐 용기가 가득 차서 나중에는 작은 그릇류를 놓아둘 공간이 없게 된다.
설거지를 할 때에 물의 온도도 중요하다. 설거지 초보 시절에 어려움 중에 하나가 고기 기름이 엉겨 붙어 있는 프라이팬을 설거지할 때였다. 처음에는 철 수세미로 박박 닦아서 설거지를 하였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프라이팬의 코팅이 다 벗겨져서 프라이팬에 녹이 슬고 음식이 잘 타고 코팅이 벗겨진 부분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물질이 음식에 섞여 들어갈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으로 시도한 방법이 설거지할 프라이팬에 물을 붓고 인덕션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끓여서 프라이팬 바닥에 붙어 있던 음식물이 일어나면 그때에 설거지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이것 또한 번거롭고 귀찮아서 잘 시행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방법이 설거지할 때에 물의 온도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설거지 물의 온도를 높여서 기름이 묻어 있는 프라이팬에 집중 방사를 하면서 솔 수세미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수세미로 살살 문질렀더니 기적같이 깨끗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방식은 싱크대 막힘에도 도움을 준다. 언젠가 싱크대가 막혀서 사람을 불러 수리를 한 적이 있는 데 싱크대 수리업체에서 하는 말이 배관 벽에 기름이 굳어 붙어서 싱크대가 막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뜨거운 물을 자주 싱크대에 부어주라고 한다. 그때에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싱크대 막히는 것과 뜨거운 물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제 알게 되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배관에 붙어 있던 기름이 녹아서 내려간다는 사실을 설거지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조심하여야 할 점은 뜨거운 물을 너무 자주 내려 보내다 보면 배관 자체가 녹아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 하면 나는 거의 설거지 전문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설거지는 역시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일이다. 설거지는 아무리 열심히 해 놓아도 끝나고 나면 표시가 나지 않는다. 가장 잘 된 상태가 원점인 것이다. 설거지가 끝났다고 해도 무언가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즐거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반면에 아내는 요리 담당이다. 아내가 요리를 시작한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어이쿠 또 설거지 거리가 생기는 구만. 내가 깨끗이 정리해 놓은 주방에서 아내가 저지리를 하고 있다. 아내는 뚝딱뚝딱 요리도 잘한다. 아무것도 없던 식탁에 맛있는 요리가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식탁에 모여들고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엄마 최고를 외쳐댄다. 물론 나도 맛있게 먹는다.
아내가 하는 일은 표시가 난다. 아내가 일을 하고 나면 무언가 남는다.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게 식탁 위에 생겨난다. 역시 세상을 살아가려면 기술을 익혀야 된다. 아내는 요리 기술이 있다. 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설거지 담당이 되었다.
윗 층에 사는 아저씨는 정년 퇴임 후에 작전을 바꾼 듯하다. 얼마 전부터 페이스북과 밴드에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즐비하게 올리며 자랑을 한다. 이제 그 아저씨는 무언가 표시가 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응원과 찬사를 받는다. 나도 설거지를 다 하고 사진을 올려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헛 된 일이다. 누가 잔뜩 쌓아 놓은 그릇을 보며 찬사를 보내겠는가 말이다.
나의 일도 표시가 나기는 한다. 할 때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표시가 난다. 내가 하루 정도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주방이 난리가 아니다. 온 주방에 음식물이 묻어 있는 지저분한 그릇이 나뒹굴고 물을 마시려 해도 마실 컵이 없다. 너도 나도 주방에 나와 물을 마시려 하다가 깨끗한 컵이 없는 것을 보고 짜증을 낸다. 이때의 표시는 기분 좋은 표시가 아니라 불쾌한 기분 나쁜 표시이다.
무슨 일인가 있어서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어 적막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컴컴한 도로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나가며 자세히 보니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내가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광경이다. 환경미화원들은 날마다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거리를 나왔을 때에 밤새 거리를 청소한 환경미화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들은 밤새 일을 하였지만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다. 거리는 당연히 깨끗해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들이 청소를 하지 않았다면 거리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표시가 날 것이다.
어떤 날은 늦은 밤에 운전을 하며 도로를 나와 보니 도로 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통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차들이 다니지 않는 한밤중에 작업을 하고 있다. 해가 밝고 나면 아무도 이들이 밤새 일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루의 생활을 해 나간다. 이들이 하는 일 역시 해도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표시가 나는 일이다.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일들이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표시 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