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한 마리가 내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크고 날카로운 눈으로 먹이를 보는 것처럼 나를 뚫어지게 보는 모습에 치약들이 놓여있는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그런 호랑이의 모습에도 항상 나와 함께 이 시간을 보냈던 이들은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선베드에 누워있고 냉탕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세신사가 나와 호랑이 사이 공간을 다니며 때 타올을 정리하며 지나갔다.
나만 보이는 환영인 게 분명했다.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내 자리를 바라봤다. 호랑이는 아직도 내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많이 피곤했나보다 하며 일단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오이 비누로 내 몸의 냄새가 오이로 변할 때까지 거품 칠을 하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호랑이가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원래 가던 온탕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탕에 들어가서 이 상황을 좀 관망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일단 호랑이와 거리를 두자 생각하고 호랑이가 있는 온탕에서 거리가 떨어진 열탕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보다 뜨거운 온도 턱에 가슴까지 담그지 못하고 발만 담갔다. 당장이라도 선베드의 아저씨나 냉탕의 아저씨에게 저 호랑이가 보이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라면 그저 미친놈 취급을 당하며 내 수요일 이 시간을 못 보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빨개진 발 한번, 호랑이 한번 바라보았다.
환영이라 생각하며 다시금 호랑이를 쳐다봤다. 그 큰 눈은 나를 바라보며 야생의 강렬함을 뿜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릴 것 같은 커다란 송곳니는 내게 두려움까지 가져왔다. 빨개진 발을 탕에서 빼서 바로 밖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내 몸의 물기를 없애며 다시 탕을 바라봤을 때도 호랑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30분 빠르게 사무실에 복귀한 내게 옆자리 용 과장이 말했다.
“왜 빨리 오셨어요?”
차마 호랑이 때문이라 말할 수 없어 “너무 더워서요.”라는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내 앞으로 대기 중인 고객들이 나를 쳐다본다. 아직 회사가 정해놓은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아 PC 모니터는 식사 중으로 잠금이 걸려있었지만, 용 과장은 핸드폰만 바라볼 뿐 번호표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숨을 쉬고 모니터에 빨간 글씨로 표시된 [일시 사용] 버튼을 누른다. 버튼을 누르니 알림창이 나오며 PC가 켜진다. ‘이번 달 일시 사용 3번 남았습니다’
띵동.
“다음 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
2년의 취업 끝에 얻은 은행이라는 직장에서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부터 은행을 원하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경제학과라는 이유로 이곳저곳 쓰다 마지막에 나를 뽑아줘서 다니고 있지만 하루마다 집계되는 개인 실적, 끊임없는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남자 막내라고 주어지는 막대한 노가성 일들 이것들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일주일에 한 번 주는 단비와 같은 휴식, 12시 30분 목욕탕을 오늘 난데없는 호랑이가 방해했다는 사실에 퇴근길에 짜증이 밀려왔다. 폭풍 같은 짜증이 밀려가고 궁금증이 들었다. ‘내가 본 호랑이가 진짜인가? 그게 아니라면 스트레스성 환각인가?’ 호랑이라면 목욕탕과 서울시에 전화를 걸어 이 사건에 대해 해결해야 했고, 정신병이라면 원인과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궁금해서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다시 목욕탕으로 향했다. 카운터에 목욕권을 건네고 153번 신발장으로 향했다. 아뿔싸 수요일이 아니어서 그런가? 신발이 있다. 옆자리 173번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탈의실에 들어섰다. 모든 것을 다 벗었지만, 이번에는 안경은 사물함에 넣지 않았다. 온전하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했다. 안경을 끼고 탕에 들어서니 감이 껴 뿌연 욕탕의 풍경이 보였다. 뿌연 욕탕 속 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샤워기 물로 김을 지우고 다시 바라봐도 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어제 본 호랑이는 내가 만든 헛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나 하며 설렜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헛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