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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스파거스 Aug 12. 2024

목욕탕 호랑이(1)

    수요일 오후 12시 30분. 평소와 같이 목욕탕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지하 2층을 누르는 순간 퍼져나오는 강력한 숯의 냄새. 물에 들어간 순간이 아닌 이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내 세상이 펼쳐진다.


    지하 2층에 내려서 카운터에 있는 커다란 눈의 히메컷을 하고 있는 직원에게 내가 가진 목욕권을 건내고 신발을 벗는다. 수많은 신발장들 사이 153번 앞에 선다. 153번 언제나 나의 자리다. 황토색 바닥에 새파란 빛을 뽐내는 남탕 화살표를 따라 20보 정도 걷다 오른쪽으로 2칸 153번이다. 


    그곳에 내가 이 바깥 세상에서 걸쳤던 모든 것을 둔다. 사원증, 핸드폰, 가방, 속옷, 그리고 내가 세상을 바라봤던 도수 높은 안경까지. 지금껏 나를 감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김철수' 내 존재 그대로 가리는 것 없이 욕탕으로 향한다.



    이 시간 나의 세계는 변수없이 똑같다. 어둡고 습한 목욕탕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색 선베드에 누워있는 늙은 노인. 수명이 다해 번쩍 거리는 전등이 그 노인을 비춘다. 그 반대편 냉탕에는 마치 수련하는 듯 팔을 앞으로 쭉 펴고 그 수련의 고통을 가끔씩 외마디 비명으로 내보내는 아저씨. 그리고 벌거벗은 우리의 사이로 때 타올을 정리하는 세신사까지 내 세상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인원 체크 후 샤워기에 따뜻한 물을 틀고 밖의 것들을 씻어낸다. 걱정, 근심, 그리고 오전에 있던 업무 등 모두 내려놓는 나만의 세레모니를 한다. 목욕탕에 지급된 비누로 거품을 내서 나를 가득 덮고 오이 냄새가 내 몸에 가득 찰 때쯤 씻어낸다. 눈을 돌려 내 자리로 향한다. 공용공간에 누구의 자리라 명하는 것이 이상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시간 나의 세계에는 내 자리가 항상 비어 있다.


    출입문에서 6걸음 걸은 뒤 빨간색 온도계, 그리고 그 옆에 한글과 중국어로 커다랗게 '씻고 들어오세요'라는 경고판이 있는 곳. 보글대는 중간의 거품들이 바다의 포말처럼 때로는 시원하게,  포근하게 덮어주는 곳. 그리고 가끔 출입하는 세신사가 여닫는 바람이 기분좋게 나를 맞이 하는 곳. 내자리, 그곳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 가슴까지 담그고 10분, 그 이상 넘어가면 세신사의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그 후 다리만 10분, 발만 담그고 10분, 마지막 5분은 다시 내 몸의 전부를 담그고 얼굴의 윗부분만 내놓는다. 숨 쉴 수 있는 코, 입, 그리고 반쯤 나가 남은 수명을 재촉하는 전등을 바라볼 수 있는 두 눈을 빼놓고 모든 것을 담근다. 귀는 물이 순환기에서 들어오고 나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멍하게 안정감을 주는 일정한 리듬으로 바뀐다. 그 상태에서 5분이 지나고 때를 벗기러 간다. 왼쪽 팔부터 시작해서 팔, 다리, 가슴, 엉덩이 순으로. 마지막 등은 샤워타올과 최근 요가를 통해 얻은 유연성을 바탕으로 때타올로 이리저리 씻어낸다. 마지막 찬물로 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나의 세레머니가 끝난다.


    수요일 12시 30분부터 점심시간 1시간. 나의 세레모니는 고요 속에서 나를 품어준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153번 캐비넷에 모든 것을 넣어놓고 들어간 욕탕, 내 자리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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