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떠나야 했다. 너무도 더운, 내가 살 수 없는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어느 날부터 인가, 그 생각에 사로잡혀 무작정 항공권을 찾았다. 여기보다 시원한, 어쩌면 시원하다 못해 시리도록 추운 곳으로 떠나야 했다.
내가 떠난 이유를 설명하자면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부유하지 못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집이 못산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부족함을 못 느끼게 나를 키워주시던 부모님 덕분이라고 할까나.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우리 동네 아이들 옷에 유행이 불었다. ‘라코스테 PK 티셔츠’.
시골 읍 단위 학교였지만 도내 최고의 테니스 학교라고 불릴 만큼 테니스에 진심인 아이들이 많았고 그 당시 최고의 스타인 나달과 페더러 사이를 헤집고 신성처럼 들어온 조코비치의 광풍이 불 때였다. 덕분의 조코비치가 입고 있는 라코스테 티셔츠가 아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인기를 얻어가더니 이젠 마치 하계 교복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유행에 뒤지고 싶지 않았다. 갓 퇴근하고 집에 도착한, 내리쬐는 햇볕에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땀을 흘리는, 엄마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엄마 라코스테 티셔츠 사주세요”
헐떡거리는 숨을 쉬며 엄마가 말했다.
“그게 뭔데? 철수야 일단 엄마 씻고 나와서 다시 얘기하자. 밖에 진짜 너-어무 덥다”
나를 뒤로하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몇 분 뒤 물소리가 그치고 수건을 머리에 감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온 엄마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뭐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깜짝 놀랐다 철수야.”
“저 라코스테 티셔츠 사주세요. 친구들 다 입고 다녀요”
“라코스테? 그게 무슨 티셔츠인데?”
“카라티인데 가슴팍에 악어가 있는 건데 친구들이 다 입고 다녀요. 요즘 TV 나오는 테니스 선수가 입고 다니는 건데 사주세요”
“악어? 아...그거 비싼 옷이잖아. 왜 하필 그걸 사고 싶니?”
“친구들이 다 입고 있으니까요. 저만 없으면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아요. 저도 그 옷 입으면 TV 선수처럼 멋져질 것 같고요”
“철수야 근데 티셔츠 한 장에 너무 비싸잖아. 차라리 엄마가 저번에 갖고 싶다고 했던 나이키 티셔츠 하나 사줄게”
“아...싫어요. 라코스테 사주세요”
“얘가 왜 그래.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니야. 그렇게 비싼 옷은 아빠도 안 입고 다녀. 안돼”
“티셔츠 한 장인데 애들한테 무시당하면 엄마가 책임질 거에요?”
잔뜩 짜증을 내며 방문을 쾅 닫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엄마의 대화를 무시하며 저녁 후 방에 들어가는 묵언 시위를 이어갔다. 우리 집의 사정을 알기에는 철없는 사춘기 소년일 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학원을 다녀온 내 방 책상에 파란색 티셔츠 한 장이 놓여있었다. 파란색 티셔츠에 그려진 악어 로고. 라코스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