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수요일 목욕탕으로 향했다. 오전에 업무가 많았던 탓일까 빨리 내 자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153번 사물함을 열고 빠르게 탕으로 들어갔다. 탕에 들어가자 다시 내 자리에 호랑이가 있었다.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비비고 다시 봐도 그 호랑이였다. 이번에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많이 힘든가 보나, 생각하며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이번에는 환각임이 확실한 호랑이와 같은 온탕에 발을 담갔다. 환각이고 내 마음이 만든 호랑이라곤 하지만 그 생김새나 눈빛이 나를 압도시켜 차마 원래 내 자리로는 가지 못하고 호랑이 맡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발부터 가슴까지 조심스럽지만, 평소처럼 내 몸을 담갔다. 위에서 아래로 호랑이가 나의 시선을 따라 나를 쳐다봤다. 가슴을 담그고 10분이 지나고 원래 루틴대로면 이제는 다리를 담글 차례다. 호랑이와의 시선이 익숙해진 탓일까 그것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자리를 살짝 호랑이 쪽으로 옮겨 옆쪽에 자리를 잡았다.
호랑이는 옆에 온 나를 바라봤다. 다리를 담그고 10분이 지나고 이제는 발만 담그고 있다. 발만 담근 채로 있는 나의 덩치보다 호랑이의 덩치는 컸다. 조금만 용기가 있으면 호랑이 옆으로 붙어서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때를 벗기고 욕탕 밖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나의 움직임에 따라 호랑이는 나를 바라봤다.
집에 오는 길에 호랑이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한 망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겠지만 내게 말을 하는 듯한 그 호랑이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열어 호랑이라고 검색했다. 멸종위기, 고양이과동물 중 가장 큰 종, 독립적인 생활과 고유 영역을 가진 동물, 하루 이동반경 60km 등 호랑이의 정보가 나온다. 내가 본 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인 것 같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나오는 꿈의 의미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한 것 같다. 내가 본 것이 꿈이 아니지만, 의미에 대해 읽어본다. 행운이나 재물이 들어오거나, 자식이 잉태된다는 둥 복스러운 해석들이 가득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Youtube에 호랑이를 검색해본다. 동물농장부터 에버랜드까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양이 같은 귀여움을 보여주는 호랑이 녀석들이 먼저 나온다. 스크롤을 쭉 내리다 EBS 시베리아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수십의 시간과 노력으로 야생의 호랑이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PD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한때 잃어버렸던 나 자신, 잊고 살았던 나의 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본 ‘아마존의 눈물’을 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을 고를 때 신문방송과를 1지망으로, 2지망은 친구들이 많이 지원했던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며 내 성적에 신문방송과는 지방대학교 지원을 해야 하고, 경제학과의 경우 서울권 대학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방과 서울이라는 갈림길, 꿈과 아닌 것에 대해 고민을 하던 차에 선생님은 내게 서울을 지원해서 가서 거기서 과를 바꾸는 방안을 제시했고 나는 그에 응했다. 그렇게 시작한 경제학과에서 나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왔다. 군을 마치고 나니 여자 동기들은 취업전선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복학 기념 겸해서 만든 동기들 술자리에서 한 여자 동기가 말했다.
“야 너희들 지금부터 자격증 같은 거 따고 학점관리 해놔라. 요즘 취업하기 존나 힘들어. 우리 과여서 취업 좀 괜찮지, 신방과 같은데는 거의 몇 년 준비한다더라”
동기의 진심 어린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그 경험담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나의 꿈에 망설임을 줬다. 동기의 탓이라 당연히 말할 수 없다. 그저 전과를 하는 데 필요한 나의 용기가 부족했다. 도전이랍시고 한 행동 때문에 내 미래가 불안해지는 게 더 싫었다. ‘다큐멘터리가 진짜 내 꿈이 아닐 수도 있어’라는 스스로 위로하며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은행에 취업했다.
그렇게 지금의 김철수, 내가 난데없는 호랑이를 마주하고 보게 된 다큐멘터리가 그 꿈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나오는 PD의 모습을 보다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잔뜩 낀 개기름에 피곤함에 젖어있는 다크서클, 시베리아 벌판에서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인터뷰했을 화면 속 PD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꿈을 이룬 자와 포기한 자의 모습이었다. 검색창에 다큐멘터리PD 되는 법을 검색하고, 방송국 공채시험 일정을 검색했다. 그러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 건지, 꿈을 이루기엔 너무 멀리 온 나 자신을 자책하며 노트북 화면을 덮었다.
수요일마다 호랑이와 마주했다. 조금씩 호랑이와의 간격을 좁게 가져갔다. 매주 보는 호랑이이지만 겁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매주 조금씩 ‘저번 주보다는 조금만 더’라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는 게 전부였다. 어느덧 호랑이와 내 사이의 간격은 엉덩이 하나 들어갈 만큼 좁아져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그 날이 되었다. 호랑이 옆자리에 앉는 순간.
오이 냄새로 나를 적시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문제없었던 상황으로 봐서는 옆자리에 앉아도 문제없을 것이다. 호랑이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가슴까지 몸을 담갔다. 마침내 옆자리로 간다니 설렘과 함께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호랑이의 어금니가 나의 시선을 가득 메우고 그 어금니가 나의 목덜미를 노리고 지금까지 인내한 게 아닌 건지 마침내 내 목숨을 거두고 기다림의 보상을 얻는 것인지 두려웠다. 10분이 지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몸이 차가워질 때쯤 호랑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금까지 선택의 기로에서 남들이 말한 안전한 길을 선택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환각에서까지 안전한 선택을 하기 싫었다. 내 마음이 가는 데로 마침내 내 목숨을 호랑이가 취한다고 해도 가고 싶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끝에 호랑이 옆자리에 앉았다. 떨렸던 마음을 위로해주듯 호랑이의 옆자리는 따뜻했다. 마침내 내 자리에 왔다는 것을 환영하듯 호랑이의 털은 나를 감싸줬고 그 따뜻함에 왠지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그 온기 속에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호랑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욕탕 밖으로 향했다. 평소와 같은 문, 같은 공간이지만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서 노트북을 꺼내고 방송국 홈페이지 공채신청 페이지에 내 정보를 입력하고 자기소개서 항목에 들어섰다. 입사 후 포부.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PD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자리를 찾기 위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