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子들의 음식, 정구지찌짐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고전시가를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소재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소재가 사군자이다. 사군자. 매화, 난초, 대나무, 국화 이 ‘매난국죽’을 사군자라 부른다. 추운 날씨에도 꽃을 피우는 지조와 절개를 닮고자 했던 선인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희한하게도 정구지만 보면 난초가 떠오른다. 꽃을 피우기 전 곧고 길게 뻗은 난초의 모습을 정구지가 묘하게 쏙 빼닮았다.


정기적으로 대형마트에 간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마트에 가면 시식 코너에서 한 끼 식사를 때우던 추억이 있었는데, 요즘엔 그런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시식의 기회가 많지 않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집에 와서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지. 주차장에 들어선 후, 3층엔 늘 자리가 없다. 4층에도 없는 날이 많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층마다 카트가 예쁘게 자리하고 있고, 카트를 끌고도 공간이 넉넉한 에스컬레이터가 있으니까. 굳이 억지로 아래층을 고집할 이유가 있겠는가. 요즘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집 앞까지 ‘쓰윽’하고 배송해주는 시스템도 있는데, 굳이 마트에 갔다는 건 분명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천천히 이 시간을 즐겨야 한다.

1층은 언제나 식품매장이고, 마트에 들른 보통의 이유는 그 식품매장이다. 마트로 향하기 전 냉장고를 열어보며 사야 할 목록을 휴대폰에 메모해놓지만, 정작 식품매장에 들어서면 메모는 그 역할이 모호해진다. 대형마트에선 식품매장에 사람을 홀리는 미묘한 공기를 흘려보내고 있을 것이다. 왜 갈 때마다 눈이 휭 돌아간단 말인가. 메모에 적힌 목록만 해결하면 30분이면 끝날 장보기가 늘 1시간이 넘어가게 되지 않던가. 일반인은 알 수 없는 놀라운 비밀이 식품매장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마트 관계자는 속으로 뜨끔하고 있을 것이지만, 굳이 들춰내진 말도록 하자.

여하튼 매장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채소 판매대다. 한국인이라면 웬만한 요리에 꼭 넣게 되는 양파를 카트에 담고, 대파를 카트에 담는다. 이상하게 이 둘은 빠지는 법이 없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괜히 그런 생각도 한다. 양파나 대파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쓸모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사랑받기 마련이다.

파프리카나 갖은 버섯, 두부, 달걀 등 메모에 적혔거나 적히지 않았던 상품들이 카트에 함께 담기곤 하는데, 특히 비 오는 날엔 양파와 대파를 넘어 가장 먼저 손에 집히는 녀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부추’라고 불리지만 기왕이면 경상도 방언인 ‘정구지’라 불러야 더 정감이 가는 그 채소 말이다. 이 정구지로 찌짐, 그러니까 전을 부쳐 먹으면 비 오는 날 이만한 음식이 없다.


군자를 닮은 정구지는 깨끗이 씻어 한입 크기로 잘게 자른다. 사실 부침가루와 감자전분을 섞은 뒤 멸치 육수로 반죽을 하면 더 감칠맛이 돌긴 하는데, 그건 좀 귀찮긴 하다. 그냥 물을 넣어도 된다. 여하튼 되직한 반죽에 부추를 넣고 소금 한 꼬집을 뿌려 잘 버무려주면 1단계는 완성이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뜨겁게 달군다. 뜨거운 팬과 차가운 반죽이 만나 바삭함이라는 완벽한 식감을 전해주므로, 이러한 세심한 과정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반죽을 얇게 펴서 가장자리를 잘 눌러준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에 팬을 슬슬 돌려준다. 팬을 돌릴 때 찌짐도 돌아가면 바닥이 어느 정도 익은 상태이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고비가 남았다. 뒤집기 한판! 주변에 어머니가 계신다면 아주 쉽게 해결될 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여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린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므로, 그냥 과감히 한 방에 뒤집어버리면 된다. 실패를 거듭해야 성장하는 법 아니겠나.

완성된 찌짐을 넓은 그릇에 담고 간장 소스를 곁들여 상을 차린다. 냉장고에 탁주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 장마철 즈음엔 미리미리 구비해놓도록 하자. 정구지찌짐과 탁주, 그리고 빗방울이 어우러진 당신의 밤은 무척이나 아름다울 테니까.


고전시가를 읽다 보면 사군자라는, 지조와 절개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 소재가 자주 등장하곤 하지만 절대, 그것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학문수양이나 세태 비판, 충효와 같은 윤리의 실현만이 주제가 아니라는 것. 다사다난한 속세에서 아예 벗어나 오직 자연에서 즐기는 흥취만 드러내는 그런 노래들도 아주 무수하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이야 당위적인 행위이긴 하겠으나 어찌 그렇게만 살 수 있겠나. 때론 삶을 즐기기도 할 줄 알아야 진정한 군자 君子가 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놀땐 좀 놀아줘야 한다는 게지!

그래서인가 정구지는 정말 모든 걸 다 갖춘 최고의 식재료다. 군자를 떠올리게 해주며, 또 흥취를 가득하게 이끌어주기도 하니까.

가끔은, 당신이 삶을 여유롭게 살아내길. 그리고 그 여유에 늘 내가 있길.

君子들의 음식, 정구지찌짐.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