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대한민국에서 처음 포도가 재배된 곳, 경기도 안성이다. 프랑스 선교사 앙투앙 공베르 신부는 1900년 조선으로 와 선교 사제 활동을 시작했고 안성에 성당과 학교를 지은 뒤 주민들의 교육과 가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빈민 구제를 위해 모국인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타국 백성들의 어려움을 위해 헌신한 공베르 신부는 참, 감사한 분이 아닐 수 없다.
공베르 신부를 기억해야 할 더 큰 이유는 대한민국 땅에 직접 포도를 들여온 분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생계 문제 해결과 더불어 미사 때 사용될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공베르 신부는 프랑스에서 포도 묘목 스무 그루를 들여와 심었다. 그리고 그렇게, 안성 포도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안성 포도의 유명세를 처음 접하고 나서 추석에 즈음하여 지인들을 위해 포도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또 정이 많아서 말이지. 얘도 주고, 쟤도 주고…… 그런데 잠깐, 포도 한 상자에 4만 원? 10명이면 40만 원? 그런데 내 통장 잔액은…… 숫자가 글자보다 힘이 센 시대여서인지 처음 리스트에 들어간 이름들이 하나둘 슬며시 지워지고 말았다. 지워진 이름들이여! 내가 꼭 성공해서 안성 포도를 선물하겠소, 미안하오!
그렇게 나름의 기준이 세워졌다. 기혼자이며, 나랑 놀아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나와의 술자리를 위해 자기 아내에게 ‘그 포도 친구 있잖아, 매번 포도도 선물 받고 해서 이번에 내가 한 잔 살까 하는데, 어때?’라고 얘기해야 하는 친구들. 그러기를 어언 8년이다. 심지어 한 친구는 자기 갓난아이에게 날 ‘포도 삼촌’이라 칭하기도 했다. ‘포도’가 내 앞에 붙는 수식어가 될 줄이야.
이것 말고도 포도과 관련한 일화들은 종종 발생하곤 했는데, 단골집인 향기포도 사장님은 포도를 사러 갈 때마다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주셨다. 정말 무지했던 난, 동생에게 와인을 자랑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야, 이거 포도로 만든 와인이야! 대박이지?”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또 있을까. 와인은 원래, 포도로 만드는 거잖아……. 동생이 배꼽 잡고 쓰러져 웃음보를 터뜨린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라니까. 심지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 민망하니, 선물로 받은 와인을 활용하여 얼른 요리나 하자. 기왕이면 앙투앙 공베르 신부님을 기억하며 프랑스 전통 음식으로 말이다. 비프 부르기뇽, 괜찮겠지?
비프 부르기뇽은 부르고뉴식 소고기 스튜라는 의미인데,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소갈비찜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정통 비프 부르기뇽은 척아이롤을 썰어 센 불에 구워주는 것으로 조리가 시작되지만 냉동실에 갈비살이 있었으므로, 그냥 있는 재료를 이용했다. 그런데 이러면 정말 갈비찜인데……. 여하튼 이어서 당근, 양파, 셀러리, 양송이, 샬럿 등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함께 볶아주어야 하지만, 역시나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을 야무지게 사용했다. 이쯤 되면 비프 부르기뇽이 아니라 안성식 소갈비찜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으나 주재료, 와인이 남았잖아!
적당히 양파 숨이 죽으면 와인(아니, 심지어 이것도 ‘안성 포도’로 만든!)과 치킨스톡, 토마토 페스토와 월계수 잎(이 재료들이 우리 집에 있다는 건 좀 의외이긴 했다)을 넣고 한참 끓이다가 중간에 밀가루 한 스푼을 넣어 잘 저어준다. 걸쭉한 농도를 내기 위함이다. 참, 이 저어주는 행위는 중간중간 계속 필요하다. 안 그러면 바닥에 눌어붙는 참사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적당히 끓이다가 오랜 시간 오븐에 돌려주는 방법도 있는데, 어차피 정통 부르고뉴식은 틀린 것 같으니 대놓고 가스레인지에서 약한 불에 계속 끓인다. 자작해질 때까지, 쭈욱.
비프 부르기뇽이라는 음식은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많은 블로거들이 자신의 SNS에 아주 자세히 조리 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이면 열 마지막에 꼭 덧붙이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건,
“우리 집이 프랑스가 된 것 같아요!”
프랑스라……. 우리 집은 전혀 프랑스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아마 눈을 감고 떠올렸을 테지. 파리의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를. 그에 반해 난 눈을 감자마자 구포동 성당과 안성 팜랜드가 떠올랐다. 거기에 안성맞춤랜드(놀이공원이 아니다)와 서운산 휴양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금광 저수지까지. 비프 부르기뇽이란 음식을 원했으나 결과적으로 안성식 소갈비찜이 완성되긴 했지만 난 안성이란 동네를 좋아하니까,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혹시나 맛보았다면, 공베르 신부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참, 안성스러운 프랑스 음식이다!”
지구인들에게 안성스러움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조용히 드넓은 호숫가를 거닐고, 거닌 뒤엔 안성식 소갈비찜과 안성 포도 와인을 나누는 기쁨에 관하여. 그러니 가을, 이 계절에 가장 어울리는 도시 안성으로, 당신이 날 찾아와 있는 힘껏 안아주길. 언젠간 내게 와줄, 슬프고도 아름다운 당신이여.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안성 대표 시인 박두진의 시, <너는>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