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학교 급식 주간 메뉴가 공개되면 아이들은 저마다 동그라미, 엑스 표시를 하느라 바쁘다. 그날그날 메인메뉴격인 음식들, 예를 들어 갈비구이, 순살치킨, 부대찌개에는 동그라미 표시가 형광펜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지는가 하면 느타리 버섯볶음이나 매생이 굴국밥, 미역 줄기 볶음 같은 것들은 아예 새까맣게 칠해져 식단표에서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그렇다고 실제 메뉴에서 사라지는 건 아님에도 아이들은 참 열심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귀엽기도, 안타깝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나도, 그러하였다. 고기나 튀김 종류만 즐겨 먹던, 아이들과 다를 게 없던 그 시절에 나에게 최악의 음식 중 하나는 ‘가지나물’이었다. 씹는 순간 물컹거리는 식감에 진저리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아마 당신에게도, 있었을 테다. 가지는 그저 어른들이나 먹을 수 있는 요상한 음식으로 여겼고 그건 정말이지 최근까지도 그러하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물컹거림을 물컹거린다고 표현하는 대신 부드럽고 말랑거리며 씹을 때마다 퍼지는 채즙의 풍미가 좋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이가 들었는지도.
나이가 드는 것과 성장한다는 것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겠으나 확실한 건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분명 나의 습관과 취향 따위는 변해간다는 점이다. 지금은 가지로 만든 음식을 찾아 먹을 정도로 참 선호하는 식재료가 되었다. 가지나물은 물론 가지로 밥을 짓기도 하며 슬라이스한 가지를 돌돌 말아 토마토소스, 치즈와 함께 구워낸 이탈리아식 멜란자네도 즐겨 먹는다. 참고로 가지는 이태리어로 Melanzana인데, ‘mela 사과’와 ‘insana 미친’이라는 단어가 결합한 혼성어이다. 말 그대로 ‘미친 사과’라는 의미인데 시칠리아 사람들이 처음 가지를 맛보고 그 맛이 너무 이상해 잘못 먹으면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칠리아 사람들은 이제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가지 요리를 즐기고 있다. 나만, 변하는 건 아니었달까?
매년 여름 함께 여행을 다니는 대학 동기들이 있다. 우리 모임 이름은 ‘광어회’인데, ‘빛 광 光’, ‘말씀 어 語’를 합쳐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빛이 되는 말이다’라는 정말 허황되고 과장된 이름이 붙은 친목 단체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대단히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대학 졸업 후 각자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우린 매년 함께 여행을 떠났고, 어느덧 그 여행도 십 주년을 맞이했다. 첫 여행에선 각자 짐을 짊어진 채 지하철을 타고 낑낑대며 이동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각자 승용차를 몰고 나름 비용 걱정 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다. 우린 이제, 어른이니까! 이들과의 만남이 끊기지 않는 걸 보면 내가 그들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들도 날, 좋아할까? 여하튼 다들 각자의 캐릭터가 아주 강한 구성원들인데, 그중 유독 활발하고 세계에 대한 도전 정신이 투철한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직장인 밴드, 연극단에서의 활동까지 병행할 정도로 참 부지런하다. 심지어는 유튜버의 삶도 살아내고 있다. 그 친구가 뮤지컬 주연 배우로 발탁되어 공연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연습도 힘든데, 그것보다 더 힘든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 주연이라서 살 빼야 해. 근데 너무 안 빠져.”
이 친구는 몸 상태만 봐도 비수기와 성수기가 구분될 정도로 고무줄 체중을 자랑하는 녀석이어서 나름의 다이어트 비법도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난 과감히 그에게 다이어트 음식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다이어터들의 심각한 적수인 탄수화물 없이 아주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초특급 메뉴, 가지 피자!
가지를 반으로 자른 뒤 살을 살짝 파내 홈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다진 양파와 블랙 올리브,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오븐에 1~2분만 구워주면 완성되는 간단하면서도 건강한 고급 다이어트 음식. 적당한 크기로 썰어 입 안에 넣어주면 아주 쉽게 입천장을 델 수 있다. 가지의 뜨거운 채즙이 씹는 순간 곧장 입안 가득 퍼지게 되므로. (그만큼 맛있다는 의미다) 가지 음식을 사랑하며 가지의 매력을 온 지구인들에게 다 알려주고픈 소중한 마음을 담아 정성껏 그 과정을 설명했으나 어럽쇼?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일단 ‘가지’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영 성에 안 차는 듯했다. 별 수 있나,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인데.
얼마 뒤 친구는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공연도 성공적으로 아주 성황리에 마쳤다. 그리고 친구는, 단톡방에 자신이 만든 가지 피자 사진을 올렸다. 어쩜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역시,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친구가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다이어트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음식이었을 거라고, 나는 혼자 믿고 있다. 가지는 그 정도로, 위대한 음식이니까.
그래, 모든 게 다 저 싫으면 그만이다. 가지도, 공부도, 건강관리도 전부, 다. 지구인들은 알아서 나이를 먹으며 변해가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법이니 그들에게 제안은 하되, 강요는 하지 말자. 가지나물에 엑스자 표시를 하든, 가지 피자로 다이어트를 하든 지구인들은 자신의 신념과 의지, 습관과 취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될 테니까. 혹시나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반갑게 환영해주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저 고개를 끄덕거려주면 그만이다. 누군가 가지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여 난 절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름대로 그 사람의 취향일 테고 언젠간 그 취향이 바뀌어 내가 만들어준 가지 피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찾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나와 당신의 변화가, 나이를 들어가며 자꾸만 맞이하게 되는 그 변화가, 기왕이면 세상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쪽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가지를 사랑하며 가지가 알려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듯 그렇게 변화를 통해 우리가 함께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우리의 키가 한 뼘 더 훌쩍 자라 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