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하고 싶을 때, 그런데 왠지 라면은 안 땅길 때, 그럴 땐 열무국수만 한 게 없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 표 열무김치가 있을 때 성립 가능한 레시피이긴 하지만.
소면을 삶는다. 소면 포장지 뒤에는 얼마나 삶아야 하는지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으니 양과 시간을 잘 확인하길 바란다. 면이 익는 동안 양념장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MBTI가 J라면 고품격 저울이나 계량스푼을 이용하면 되는데, 나처럼 P인 이들에게 그것은 사치다.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식초, 설탕이나 물엿 따위를 적당히 종지에 담아 섞어주고 맛을 보면 된다. 혀에서 단맛을 요구하면 설탕을, 신맛을 요구하면 식초를 더 넣어주는, 뭐 그런 식이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에겐 열무김치가 있다!
다 삶아진 소면은 찬물에 벅벅 빨아준다. 헹구는 수준이어선 안 된다. 정말 빨래를 빨 듯 거칠게 소면을 다뤄 주어야만 쫄깃하고 탱탱한 식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소면을 깔고, 양념장을 넣고, 열무김치를 썰어 넣은 다음, 열무 김치통을 기울여 김칫국물을 살짝 부어주면 당신이 머문 그 공간은 천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 음식의 핵심은 김칫국물이다. 무너진 균형을 맞춰주는 천사의 날갯짓이라고 해야 할까.
오죽 맛있었으면 마침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김칫국물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랬다면 지구인 모두가 천국에서 살 텐데. 지구인들 모두 우산 없이 혀를 내밀고 하늘을 보며 걷게 될 텐데. 그런데 그때, 내 생각을 엿듣기라도 했는지 어디선가 커다란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비에 대한 쓸모없는 단상이 시작되었다.
비는 사실 빗방울의 무리이다. 성격까지 똑 닮은 대규모 집단이다. 내가 알기론 빗방울의 수를 정확히 헤아리는 과학자는 아직은 없다. 굳이 그러한 시도를 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종종 문학을 하는 이들은 그 수치를 정확히 계산해내곤 한다. ‘빗방울의 개수만큼 널 사랑해’라고 외치는 걸 보면, 문학은 정말이지 힘이 세다. 여하튼 그 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인데, 동질감이 무척이나 강한 빗방울의 무리는 아무리 집단의 크기가 방대해도 절대 어긋남이 없다. 빗방울은, 동족을 절대 낙오시키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화려하다. 아마 어미의 자궁을 떠나자마자 여미하게 펼쳐진 지구의 한 조각을 자신의 시야에 담아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을까? 어떤 빛깔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었을까?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인가. 이것이 삶 속에서 당위적인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빗방울의 삶은 화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인가? 이들은 삶 자체를 즐길 줄 안다. 세상천지를 두드리며 축제를 열고 온갖 진동으로 세상을 울리곤 한다. 눈치를 본다거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 빗방울은, 삶의 어떤 조각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빗방울의 행렬이 막을 내린 후 촉촉이 젖은 길가엔 삽상한 기운이 가득해진다. 초점거리를 당겨보면, 몇몇 녀석들이 청청한 잎사귀에 누워 온갖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노자의 무위無爲가 실체를 지닌다면 아마 이러하지 않았을까.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작은 자연물이 자신의 모태를 관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때론 부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일과를 마친 후에 품어낸 달콤한 휴식이자, 새롭게 시작될 하루를 준비하는 명상의 시간일 것이다. ‘휴식休息’의 한자어를 풀어보면, 쉴 휴休는 사람 인人과 나무 목木자가 합쳐진 것으로 나무에 기대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숨쉴 식息은 마음 심心 위에 스스로 자自가 올라간 형상인데, 이들을 다시 잘 버무리면 결국 휴식이란 말은 ‘스스로 마음을 쉬게 한다’ 혹은 ‘나무에 기대어 호흡하며 쉰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휴식을 통해 마음까지 다스리는, 빗방울은 삶의 태도조차 경이롭다.
그런데 빗방울이 갖는 최고의 축복은 사실 따로 있다. 찰나에 불과해 보이는 그들의 생애는 알고 보면 무한히 순환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빛에 의해 소멸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소멸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 순환은 늘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판으로 찍어낸 듯 동일한 장면만 반복되는 삶이라면 아마 지루함이 지겨워서 지칠 것이다. 반대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는 삶은 기대감이 넘치는 기쁜 나날이지 않겠는가. 오늘 아침 내 손등에서 반짝였던 녀석이 내일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미구엘씨네 창가에 머물 수도 있고, 또 다음 날엔 콜롬비아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에서 에스코바르라는 청년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체험보다 더 위대한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문화적인, 역사적인 식견은 말과 글의 힘을 빌려 삶의 이치를 깨달은 이들의 그것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빗방울이 가진 축복의 삶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창가에 앉아 마지막 한 가닥까지 야무지게 열무국수를 들이켜고, 투명하게 물들어버린 바깥세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어둑어둑해진 창 너머의 세계엔 이미 그들만의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덧 빗방울은 하나둘 창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비웃는 양,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