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미스터 제육왕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그게 아마 2014년 3월일 것이다. 사실 ‘아마’를 붙일 필요는 없다. 신규교사로 발령받고 첫 회식이었으니, 무조건 그때일 수밖에 없다. 같은 교과 선생님들께서 신입을 위한 환영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직장이라 봤자 고작 1년 남짓한 경험밖에 없던 나로서는 사회생활 레벨이 낮아도 한참 낮은 상태였는데, 여하튼 술자리에 대한 거부감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회식 자리에선 자취남이 평소엔 구경도 못 할 맛난 음식들이 즐비하니까. 선배들도 오물오물 잘 먹는 후배를 좋아하지 않을까? 그 뭐냐, 복스럽게 잘 먹으면 예쁨 받고……. 아, 그건 며느리 얘긴가.

기대에 부응하듯 그날 회식 장소는 으리으리한 한정식집. ‘상다리가 부서지게’라는 말이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에라이, 눈치 보지 말고 먹어! 원래 계획대로 메인 메뉴격인 수육을 주로 공략하며 배를 든든히 채워나갔다. 분위기는 아주 괜찮았다. 선배 선생님들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시며 기분 좋게 대화를 걸어주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기습공격이 시작되었으니. 갑자기 옆 테이블의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께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이시는 게 아닌가.


“이봐 기 선생, 대체 잔은 언제 돌릴 거야?”


어라? 잔을 왜 돌리지? 소주잔으로 저글링을 하라는 건가? 유리라서 깨지면 위험하지 않나? 답도 제대로 못 하고 혼자 당황하고 있는데 그나마 연배 차가 가장 덜 나는 선생님이 슬쩍 내게 귓속말로 답을 주셨다.


“가서 한 잔씩 따라드려.”


그랬구나. 한 잔씩 따라드리면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따라주시는 술도 받아먹고 그랬어야 하는 거구나. 왜 아무도 그런 문화를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뭔가 억울했지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만회해야 했기에, 여기저기 다니며 따라드리고, 받아 마시고, 열심히 신입으로서의 역할을 다해냈다. 그렇게 나는 취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진 않으나 분명 2차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도 역시 신입 막내의 활약이 필요했다. 포장마차 분위기가 물씬 나는 술집이었는데, 안주는 막내가 골라야 하는 소위 ‘국룰’이 적용되어 나는 가만히 —흐리멍텅한 눈으로— 메뉴판을 살폈다. 그리고 눈치도 없는 데다가 술에 지배까지 당해버린 그 막내는, 생각지도 못한 메뉴를 떡하니 외치게 된다.


“저는 제육볶음이 먹고 싶습니다!”


알콜 성분이 많은 기억을 삭제했지만 당시의 그 싸늘한 분위기만큼은 명확히 기억한다. 제육이라니. 지금껏 수육을 그렇게 먹고도 또 고기를? 막내에게 제육은 ‘최애’음식이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분위기는 갑자기 가라앉았지만, 다행히 선배 선생님들은 ‘한창 잘 먹을 때지’라며 흔쾌히 제육볶음을 시켜주셨다. 물론 그 음식은 내 앞에만 있었고, 다들 가볍게 마른안주를 드셨다는…….

다행히 이제는 사회생활 레벨이 많이 상승하여 2차 자리에서 제육볶음을 시키는 파렴치한 짓은 ‘덜’ 하는 편이다. 대신 1차로 후배들을 제육 앞으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뭐, 집에서 맛있게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아, 서론이 길었으나 이 글은 결국 제육볶음을 찬양하기 위한 글이다!


제육볶음을 위한 고기, 이건 취향 차이가 있을 듯한데 앞다리살? 목살? 난 무조건 삼겹살이다. 고기는 원래 기름 맛이라는 —쓸데없는— 철칙을 가진 나로서는 삼겹살 말고는 다른 선택지란 없다. 심지어 두껍게 써는 걸 선호한다. 대신 고설파마후깨참(고추장, 설탕, 파, 마늘, 후추, 깨, 참기름) 양념에 버무려 하루 이상 숙성하기! 그래야 맛이 잘 배어드니까. 그리고 원래 제육볶음이 그런 음식이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헷갈리는데, 제육볶음은 미리 양념에 재워두었다가 볶아내는 음식이고, 두루치기는 끓이는 것이며, 주물럭은 말 그대로 양념을 주물주물하여 바로 불에 구워내는 음식이다. 절대 같지 않다. 셋은 완전히 다르고 맛도 분명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제육볶음과 두루치기, 주물럭의 차이가 심한 것은 아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고 지역마다 다른 점이 있다고도 한다. 그나저나 아니, 뭘 그렇게까지 구분하냐고요? 제육볶음에 진심인 저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도 언급될 정도로 우리 민족 모두가 사랑하는 음식, 제육. (물론 1920년대의 제육이 지금의 제육과는 양념 면에서 크게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빨간 양념의 제육볶음은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대학가에서, 회사 근처에서, 기사 식당에서 제육볶음만큼 인기 있는 음식도 없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제육은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제육을 비롯하여, 나의 진심이 닿는 영역은 생각보다 많다. 마블 영화 시리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기아 타이거즈, 아잉거 맥주와 드라마, 뭐 나열하다 보면 끝이 없을 정도다.

무언가에 진심일 때, 그걸 지켜보는 주변인들은 이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한다. 융통성이 없다는 식으로 여겨질 수 있으므로. 그래, 혹여라도 그 진심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본다면 그건 잘못인 게 맞다. 그게 아니라면,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무언가에 진심인 삶은 꽤 풍요롭고, 기쁨이 가득한데 말이다. 그러니 그저 수동적으로 흘러갈 듯 살지는 말자. 이 지구는 정말이지 흥미로운 것들로 넘쳐난다. 조금만 둘러보면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더 가치 있게 살아내는 방법은,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제육을 사랑하고, 제육도 나를 사랑하니, 나는야 미스터 제육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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