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은, 희망이다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삶은 결국 희망이 있어 존재한다. 내일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우린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내일이란 시간은 반드시 주어지기 마련이니까. 심지어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에게 차이고 빚까지 지는 바람에 결국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한강 위 밤섬에 표류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된 김씨 아저씨에게도 그 희망은 있었다.

영화 <김씨 표류기>의 도입부 내용이다. 김씨는, 불과 얼마 전 죽음을 선택했던 그 김씨 아저씨는, 섬에서 짜파게티 봉지를 줍게 되고 갑자기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휩싸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섬 위에서 직접 짜장면 만들기를 시도한다. 면을 뽑기 위해 농작물까지 재배하는 김씨! 김씨 아저씨를 몰래 관찰하던 여자 김씨는 밤섬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지만, 김씨 아저씨는 이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여자 김씨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짜장면은, 자기한테 희망이라고.


나에게도 좌절과 악몽으로 점철된 하루를 살던 때가 있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주룩 흐르고 어둠이 두려워 이불 속에 움츠러들던 절망의 시간.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 당당히 짜장면을 만들어 먹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아, 정확히는 짜장밥이다. 이상하게 짜장면은 소화가 잘 안 된다. 뭐, 무슨 상관인가. 짜장이면 만사 오케이지.


춘장이 필요하다. 춘장 브랜드 중 가장 잘 알려진 그 제품을 주문했는데,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먹기엔 양이 참 과했다. 아무리 희망을 위한 짜장이라지만, 일주일 내내 짜장만 먹을 순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돌이킬 순 없었기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새까만 춘장을 한 봉지 가득 튀겼다.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그러는 동안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꺼내 썬다. 당시 냉장고엔 돼지고기 앞다릿살과 양파, 양배추만 있었는데 그거면 충분하다. 무슨 상관인가. 짜장이면 만사 오케이지. 역시 기름을 두르고 볶아주기 시작!

적당한 때에 튀겨 놓은 춘장 한 숟갈, 설탕과 굴소스를 갖은 재료와 함께 볶아주었다. 농도를 잡기 위한 전분물까지 풀어주면 이곳은 영락없는 상해루! 만리장성! 길림성! 짜장 분말로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짜장이면 만사 오케이 아니냐고? 아니다. 진짜 짜장은 오직, 춘장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각양각색의 직업군이 존재하는 이 지구에서, 나는 내가 가진 교사라는 직업을 굉장히 사랑하는 편이다. 물론 서른두 가지 정도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 빼면 정말 완벽하다. 특히나 아이들의 존재가 그렇다. 하나하나 색과 모양이 다른 조각들이 모여 매년 새로운 삶을 완성해준다. 지루할 틈이 없다. 지루하긴 무슨, 십 년이 지났음에도 도통 적응이 안 된다!

다만 안타까운 건, 점점 아이들이 띠는 색이 탁해진다는 것이다. 오색찬란했던 그들의 세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성적에 좌절하고, 대학에 운명을 거는가 하면, 우울증에 자퇴를 고민하는 이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어쩌면 그들의 아픔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똑같이 아팠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베르테르 효과마냥 나도 모르게 모방을 하고 있었는지도.


우리 반 녀석 하나를 데리고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심리적 어려움을 겪느라 학교생활을 포기하고 싶어 하던 마음 여린 학생이었다. 녀석은 짜장면, 나는 소화가 안 될 것을 걱정하며 중국식 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간 본 적 없던 낯선 표정들을 보고 말았다. 정확하게는 한껏 밝아진 녀석과, 나를 노려보는 짜장의 매서운 눈초리를!

짜장은, 새까만 그 짜장은! 나의 우울을 제거함과 동시에 쓸데없는 기우마저 잠재워주었다. 짜장이 나를 다그쳤다. 탁한 색은 색이 아니냐고, 새까만 색은 그럼 죽은 색이냐고. 짜장의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결국 가끔 삶이 새까맣게 칠해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의미로 전해졌다. 덕분에 우린 새로운 도화지를 찾아 헤맬 수 있다는, 그런 후엔 새로운 색을 칠할 수가 있다는, 기존에 있던 색감보다 훨씬 다채로운 명작의 탄생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결국 짜장은 희망을 알려주려던 것이었다!

나는 왜 주변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지 못했던 걸까. 성적이 떨어졌다고? 이제 그럼 올라갈 일만 남았네! 직장에서 잘렸다고?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면 되겠네! 와 같은 용기와 위로를 나는 왜 전해주지 못했던 걸까. 우리 반 그 녀석은 짜장면을 먹은 그날 이후 누구보다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다 결국 목표 대학에 합격했다.

혹시라도 당신의 하루에 어둠이 거대한 몸을 들이밀더라도, 크게 걱정하지는 말자. 길한 일이 있으면 흉한 일도 있고, 재앙과 복은 번갈아서 오기 마련이니까. 눈물을 닦아내는 용기를 낸다면, 이불을 박차고 나올 수 있다면, 그리고 짜장을, 춘장을 튀겨 직접 볶아 만든 그 짜장을 먹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내일은 언제나처럼 하얀 도화지가 되어 당신 앞에 훤히 펼쳐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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