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볶음밥이 선발이던 날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딱히 꺼내 먹을 반찬이 없었다. 오직 김치뿐. 이럴 땐 순식간에 뚝딱 만들 수 있는 볶음밥이 최고다. 당장 냉장고를 뒤져 선수들을 집합시킨다.

냉장실엔 갖은 채소들이 출격을 대기하고 있다.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기본 식재료, 대파와 양파는 언제나 주전 멤버로서 제 역할을 다해준다. 믿음직한 선수들이다. 대진에 따른 상대 팀 전력도 다 상관없다. 대파와 양파만으로도 기본은 한다.

냉동실엔 돌덩이가 되어 버린 냉동 새우가 버티고 있다. 쟁여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잘 녹여서 적당한 타이밍에 익혀주면 탱글탱글한 식감이 일품이다. 오늘은, 돌덩이 새우가 선발이다.


파를 송송 썬다. 기름을 두르고, 파기름을 낸다. 파는 노릇노릇 익어가고, 부엌은 파기름 향이 장악해버린다. 초반 기세가 이토록 중요하다. 나는 이 타이밍에 즉석밥을 넣는다. 밥알을 씹을 때 입안 가득 향이 퍼지는 것이 좋으니까. 잘게 다진 양파도 함께 볶아준다. 양파의 역할은 아삭아삭함이다. 너무 오래 열을 가하면 물컹해지는 식감이 너무 많아진다. 달큰한 맛을 위해 최대한 오래 볶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건 대파가 해주기 때문에 포지션이 겹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선발 투수를 등판시킨다. 마트에선 갖가지 종류의 냉동 새우를 판매한다. 칵테일 새우, 흰다리새우, 블랙타이거 새우, 조금 비싼 꽃새우 등. 웬만한 미식가가 아니라면, 가장 싼 새우를 구매하길 추천한다. 볶으면 맛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트에선 새우를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지만, 새우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 한 가지 구분 기준이 더 생겼다. 그것은 꼬리이다. 꼬리를 살리느냐, 마느냐. 겉봉투에 써있다. Tail-on과 Tail-off. 친절하게 해석하자면 ‘꼬리가 있는’ 그리고 ‘꼬리를 뗀’이다. 취향 차이겠지만, 난 꼬리가 붙어있는 새우를 선호한다. 새우의 꼬리까지 아작아작 씹어먹는 걸 즐기는 편이다. 마침 그때 화가 나 있다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다음 과정에서 나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한다. 스크램블드에그를 넣느냐, 블랙 올리브를 넣느냐. 스크램블드에그는 그냥 볶은 달걀 요리이다. 이름은 영어지만, 팀에 합류하면 완전한 중식 느낌을 내어준다. 참고로 스크램블드에그는 중국어로 ‘炒蛋’이라고 한다. 챠오단. 달걀 볶음이다. 스크램블드에그를 선택한다면, 굴소스까지 연이어 등판시키길 추천한다. 감칠맛의 끝판왕, 굴소스. 예전엔 팬더가 그려진 굴소스만 인정받았던 때도 있지만, 사실 뭘 써도 다 맛있다. 굴소스는, 굴소스일뿐.


블랙 올리브를 넣는다는 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올리브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벗어나질 못한다. 미국에서 건너온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의 블랙 올리브를 추천한다. 통조림 형태로 되어 있고, 저렴하게 대량 구매할 수 있다. 유통기한이 길어서 팬트리에 넣어두고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났을 때 꺼내먹으면 된다. 올리브를 식감 때문에 먹는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 무엇보다 올리브가 주는 풍미가 좋다. 어떤 풍미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올리브만의 풍미가, 분명 존재한다. 오죽했으면 서양 사람들은 이 올리브로 기름을 다 짜서 먹었겠는가. 여하튼 올리브가 들어가면 볶음밥이 아니라 ‘필라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다. 필라프는 우리 말로 볶음밥이다. 그런데 필라프를 파는 그 어떤 가게에서도 볶음밥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린 대세를 따라 올리브를 넣었을 땐 필라프라고, 고상하게 이름 붙여주면 된다. 스크램블드에그에 굴소스가 더해지듯 올리브엔 소량의 버터를 등판시키는 것이 어울린다. 언제나 조합이란 것은 존재하니까. (물론 정통 필라프는 나름의 조리 방식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혹시나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과감한 ‘웍질’은 필수다. 웍질은 겉멋 든 자의 행위가 아니라, 양념을 고루 섞어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필승조를 투입하여 승기를 굳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요리의 끝은, 뭐니 뭐니 해도 플레이팅, 음식을 보기 좋게 담는 것이다. 볶음밥만큼 다양한 플레이팅이 가능한 요리도 흔치 않다. 어릴 적 소풍날 도시락에 담긴 곰돌이 볶음밥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머닌 곰돌이의 눈과 코를 만들기 위해 굳이 치즈와 김을 사 오셨을 거다. 그 정성을, 우린 잊어선 안 된다. 볶음밥 플레이팅이라면, 우선 밥을 밥그릇에 꾹꾹 채웠다가, 넓은 그릇에 뒤집어서 올려놓고, 그다음 밥그릇을 쏙 하고 빼면 된다. 작은 볶음밥 언덕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위에 깨를 뿌리면 모든 것이 완성. 필라프 플레이팅이라면, 깊이가 있는 그릇에 밥을 담길 추천한다. 그리고 하얀 소스를 튜브에 넣어 모양을 내주고, 살짝 파슬리 가루를 뿌려주면 된다.


새우볶음밥을 만들어 보았다. 오늘도 선수들의 활약은 박수를 쳐줄 만했다. 선발 투수는 묵직하게 경기를 장악했고, 나머지 선수들도 안정적인 경기 운영으로 감독의 엄지척을 받아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관중석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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