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여전히 부끄럽고 창피하다. 브런치가 ‘breakfast’와 ‘lunch’가 결합한 단어라는 걸, 나는 몰랐다. 점심 먹기 전 가볍게 간식 삼아 반드시 ‘빵’을 먹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 그래서 브런치가 ‘bread’와 ‘lunch’의 혼성어라고 생각했었다. 아뿔싸! 브런치는 빵식이 아니라, 아점이었다!
내겐 브런치가 꿈이었던 적이 있다. 직장인이라면 매한가지일 듯하다. 그들의 아침에 여유는 사치이기에 쉽사리 경험하기 힘든 꿈이었다. 그래서일까? 오전 10시 즈음 느지막이 일어나 감지 않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커피 한잔과 ‘빵’을 먹는 하루의 시작. 이 장면은 언제나 내겐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우아함과 낭만이었다. 성공한 사업가? 유명 연예인? 나도 모르게 그들이 닮고 싶었었나 보다. 한 끼 따라 한다고 뭐가 바뀌겠냐마는, 아니 말 그대로 한 끼 식사인 데 뭐. 한 끼 정도는 괜찮잖아!
꿈은 생각보다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수능 다음날이었나, 징검다리 연휴 사이에 낀 평일이었나, 여하튼 교사에겐 ‘학교장 재량휴업일’이라는 소중한 선물이 있기에 그날이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브런치의 꿈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잠깐만, 주말도 있고, 방학도 있잖아?
프렌치토스트처럼 간단한 음식도 괜찮겠으나 기왕이면 맛과 영양을 고루 잡는 메뉴를 원했고, 그렇게 선택된 것이 과카몰레 샌드위치. 재료도 간단하다. 아보카도와 토마토, 양파와 올리브오일, 거기에 적당한 레몬즙과 소금 후추면 완성. 조리법도 간단하다. 앞서 언급한 재료들을 다지고 다져 한꺼번에 섞어주면 끝. 그런데 시작부터 삐걱대긴 했다. 과카몰레의 주재료인 아보카도는 어느 정도 숙성이 되어야 떫은맛이 사라지고 부드러워지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한 녀석들은 숙성은 무슨 숙성 근처에도 못 간 아주 시퍼런 색이었다. 제대로 숙성된 아보카도는 살짝 검은빛을 띠는데 말이다. ‘나 익으려면 한참 멀었어요’라며 녀석은 날 놀려댔다. 이 짜식이, 까불어? 아보카도를 빠르게 숙성하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고! 뜨거운 열기에 너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30초간 돌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아무 생각 없이 맨손으로 만졌다가 손가락 피부가 벗겨지고 말았다. 잠깐 돌렸는데 이 정도로 뜨겁다고? 지방이 많이 함유된 과일이라 그런 건가. 어쨌든 시시한 결투는 혈전이 되었고 지는 쪽은 나였다. 이렇게 패배할 줄이야. 분했지만, 패자는 더는 말이 없어야 하는 법. 브런치나 먹어보자고!
식빵에 과카몰레를 양껏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상 속 장면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예쁜 도마 위에 올린 플레이팅, 그리고 커피 머신으로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 경고! 손으로 들고 우걱우걱 먹으면 안 된다. 반드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할 것. 기왕이면 냅킨과 산뜻한 음악도 준비해보자.
이 모습을 쓸데없는 허세라며 아보카도가 다시 날 놀렸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말한다. 그때 그 순간엔 정말이지, 낭만이 가득했다. 머리를 안 감았다는 사실 말고는 상상 속 장면과 유사한 점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 고애신의 대사. 다시 보아도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작금은, 낭만의 시대인가?”
당신의 답이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 지구인은 반드시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우주에는 언제나 낭만이 가득하고 그래서 내게 작금은, 낭만의 시대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지중해 어느 해변에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거나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켜는 것만이 낭만인 건 아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여유롭게 즐기는 브런치, 휴대폰 메시지에 담아 전하는 다정한 인사,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설레는 시간 모두 낭만이자,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삶이다.
화려함을 좇느라 삶을 낭비하고 있다면, 이번 주말 과카몰레 샌드위치를 브런치로 즐겨보길. 예쁜 플레이팅과 커피 한잔, 냅킨과 산뜻한 음악이 함께하는 당신의 ‘아점’은 아마 귀하고 품격있는 낭만으로 가득할 테니까.
경고! 머리 감기 금지! 손으로 들고 우걱우걱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