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아버지는 58년 개띠, 그러니까 이제 환갑도 지나 비로소 노년을 바라보는, 어른이 되셨다. 아버지가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면 그럼 난, 대체 무어란 말인가. 무어랄 것도 없다. 나는 안다. 아직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다를 게 없는 나의 지지부진한 성장의 속도를, 잘 알고 있다.
이를 잘 알게 해준 것은 역시나 아버지였다. 고작 단어 몇 개로 장난질을 하는 그런 부류의 인물이 아니기에, 아버지는 늘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솔선수범의 전형이랄까. 난 솔선수범이란 말을 사람으로 만들면, 아버지가 등장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이신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신문을 읽고, 씻고, 출근하며, 아침 식사는 회사에서 가볍게 해결하신다. 물론 그 가벼움은 어머니의 노고로 가능했던 것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감사하고 계실 것이다. 그건, 그래야만 하니까.)
고작 기상 시간 따위만으로 아버지의 솔선수범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일을 하신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회사 후배들에게 ‘라떼는 말야’ 따위를 시전하며 일을 미루는 법이 없다. 어디 멀리 출장을 갈 때에도 가장 먼저 출장지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가장 늦게 그곳에서 떠난다. 후배들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소위 ‘썰’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그 후배들이 전하는 참된 감사의 메시지에서 비롯된 내용이다. 어차피 군인 연금도 잘 나올 테고, 몇 년 편하게 버티다 정년 퇴임이나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아버지께 여쭈었던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뚱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건, 쪽팔리잖아.”
일평생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짧은 햇수이지만, 30년 넘는 일평생 유일한 롤모델은 아버지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좁디좁은 틈을 뚫고 한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으니, 그는 아버지의 동갑내기 58년 개띠, ‘김 선생님’이셨다.
김 선생님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면 —개띠답게— 개판이었다. 그와 처음 대면한 술자리, 냉동 삼겹살집에서 그는 나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거친 말을 내뱉으며 빈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고, 비우면 다시 채워주길 반복했다. 그렇게 그는 한 점 한 점 내 살갗을 —정확히는 내 정신줄을— 물어뜯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반드시 자기 잔도 채워 같이 마셔대는데, 사회 초년생이 이를 어찌 거부하겠는가. 그보다 더 무시무시했던 건, 그가 요리? 제조? 여하튼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낸 ‘냉삼 볶음밥’이었다.
가게 종업원에게 가위를 빌려 바싹하게 구워진 냉동 삼겹살을 잘게 잘라낸다. 주변에 있던 밑반찬, 콩나물이나 김치 따위도 마찬가지다. 가위질 장인이 있다면 아마 이 사람이겠지, 싶을 정도로 재빠른 동작이 너무도 살벌하게 느껴졌다. 불판 위에 남아있는 고기 기름에 잘게 썬 재료들과 밥 두 공기를 ―반드시 양손에 숟가락을 들고― 야무지게 볶아준다. 그리고, 김 선생님은 간을 맞춘답시고 기름장과 쌈장을 함께 버무리셨다. 오래 볶을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 조리가 된 재료들이어서 살짝 데워준다는 느낌이면 충분하다. 단, 잘 버무려진 재료들은 불판에 이불을 덮어주듯 얇게 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누룽지의 식감을 얻을 수 있다.
젠장, 맛있었다. 난 역시나 한국인이 분명했다. 한국인은 마지막에 꼭 밥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그 이상한 논리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시고 흐뭇해졌는지 김 선생님께서는 다소 음흉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안주도 새로 나왔는데, 한 잔 더 해야지?”
그렇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취해버렸다.
다음 날 만난 김 선생님께선 거짓말처럼 아주 멀쩡해 보이셨다. 그런데 그 멀쩡함은 멀쩡하다고만 하기엔 많이 부족한 표현이었다. 아주, 젠틀했다. 말수도 적고, 상냥한 데다가, 후배들에게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옆자리 선생님께 김 선생님에 관해 여쭈니 ‘그분은 공과 사가 명확한 사람’이란 말이 돌아왔다.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 눈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불편한 존재들이 —마치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다는 듯— 어딜 가나 있질 않은가. 김 선생님께선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어른’이셨다.
김 선생님께서 내 시야에 들게 된 가장 궁극적인 사건은, 그가 학교를 떠나기 하루 전에 벌어졌다. 원래 김 선생님께선 늘 부끄러워하셨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량이 턱없이 적다는 걸 말이다. 그래도 그가 자신의 위치에서 뭐라도 하나 더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음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마음일 뿐 꺼내 보지 않는 한 이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
퇴임 직전 그의 업무는 ‘교무 기획’이란 것이었다. 당시 교무 기획 담당자에겐 딱히 업무랄 게 없었다. 교무실에 있는 큰 칠판에 달력 표시가 되어 있는데, 거기에 학사 일정을 채워 넣는 것 정도?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긴 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김 선생님께선 퇴임 하루 전 그 비워진 칠판을 한 칸 한 칸 채워 넣고 있었다. 퇴임 하루 전에 말이다. 사소하고도 보잘것없는 그 일을, ‘누군가 하겠지’ 하고 넘어가도 될 그 일을, 그는 짧은 팔을 힘껏 올려 정성스레 해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들은 퇴임 하루 전이면 자기 신상 정리나 하고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하루 전이 아니라 퇴임 몇 년 전부터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인데 말이다. 그분은 떠나는 자신의 빈 자리를 채울 그 누군가를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의 진심이, 온전히 전해진 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는 것 같긴 하지만― 김 선생님께서는 내 롤모델이 되지 못하셨다. 그건, 본인만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어른으로서의 마지막 역할, ‘어른을 만드는 일’에는 그닥 관심이 없으셨던 게 문제였다. 지금 학교엔, 어른이 없다.
내가 이 글을 끄적인 이유는, 특정인을 비하하거나 특정 집단을 공격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저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 연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나의 성장 속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이니까. 에라잇, 냉삼 볶음밥이나 만들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