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에게 전하는 사소한 음식, 소고기 육전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귀신 잡는 용사, 해병! 난 스무 살 이후 귀신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전에도 없었다) 귀신이 애초에 내 근처에 올 수 없으므로. 대한민국 해병대 제1 상륙사단 72대대 5중대 3소대 청룡 병장 출신인 나의 보이지 않는 강렬한 기운이 귀신들은 얼씬도 못하게 막아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당신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수 있으니 절대, 쉿!


어쩌다 단톡방이 생겼던 걸까. 함께 고통의 2년을 보낸 선·후임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고 결혼을 ‘안’ 하고 있는 네 명의 총각들은 결단력 있게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 총각 중 가장 선임이었던 우리 집이 그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니! 천안에서, 안양에서, 저 멀리 하남에서 금요일 반차를 쓰고 경기도 안성으로, 그렇게 달려왔다.


‘뭐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선임인데다 나이도 많은 형으로서 동생들을 그냥 평범하게 맞이할 순 없지. 환영의 메시지를 담은 화려한 음식을 준비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대체 뭘 준비해야 하는 걸까. 초록 창을 열고 한참을 검색하다 떠오른 아이디어는 ‘명절 음식’이었다. 우린, 가족이니까! 그리고 그 명절 음식 중 가장 만만한 메뉴, 육전을 준비했다.

뭐? 육전이 만만하다고? 당신은 조금 의아할 수 있겠으나 의외로 육전을 만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우삼겹을 팬에 볶아주고 고기 한 점 한 점을 예쁘게 잘 배치한 뒤 그 위에 달걀물을 부어주면 끝! 육전 한 장에 5분 컷! 여전히 당신은 의아할 수 있겠으나 비주얼이나 맛이 절대 정통 육전에 뒤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후임들에게 대접할 그 육전을 후임들이 오기도 전에 나 혼자 다 먹었을까! 앗, 그들은 모른다. 사실 내가 육전을 준비했었다는 걸. 대신 데리고 나가서 안성 한우를 사줬다. 같은 소고기인데, 괜찮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것도 비밀이니까 절대, 쉿!

육전.jpg 생각지도 못하게 발견한 당시 육전 사진


‘얼마를 주면 군대에 다시 갈 수 있을까’에 관해 SNS상에서 이야기가 돌던 때가 있었다. 10억이면 OK, 라고 하던 이들도 있었는데 난 강조해서 말하지만 수십, 수백억을 줘도 절대 다시 갈 생각이 없다. 나의 2년이란 시간이 지닌 가치는 돈으로 절대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여전히 내게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 1위는 군대다. (참고로 2위는 치과) 그 정도로 최악인 곳에서 함께 하루하루를 버텨낸 전우들. 우린, 함께 고통의 시간을 나눈 가족이자 형제였다. 그래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우린, 아주 오랜만에 만났어도 뜨거운 정으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 청년이라 부르기엔 서른이 넘어도 훨씬 넘은 아저씨들이지만, 다들 스무 살로 돌아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잔뜩 떠들어댔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건 정말 오해가 아니다. 너무 재밌다! 그러니까 나는 축구 실력이 워낙에 뛰어나서 이병 때부터 중대 대표로 뛰고…… 이것 봐, 나 또 흥분했잖아.


누구에게나 아픈 시절은 있다. 대부분 지구인은 그 아픔을 혼자 잘 이겨냈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반드시 아픔을 덜어내 준 누군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나가듯 건넨 말 한마디는 커다란 용기가 되었을 테고, 슬며시 건넨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는 삶을 되돌아볼 소중한 여유가 되었을 테다. 사소한 듯하지만, 누군가의 그 사소함이 없으면 우리의 아픔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시절 사소했던 그들이 난 너무도 고맙고, 소중하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황동규 <즐거운 편지> 中


나도 당신의 아픔을 치유해줄, 사소함이 되고 싶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은 평소 우리에게 전혀 인식되지 않는 사소함이지만 그 사소함이 없다면 지구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당신은 알까?

결국 난 오늘도 ―군대 후임들과의 만남으로 시작하여― 이야기의 끝을 당신으로 끝맺고 있다. 사소한 당신, 사랑하는 당신.

고마운 사람에게 전하는 사소한 음식, 소고기 육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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