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1인 가구의 한계 중 하나는 먹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것이다. ‘1인 1닭’을 능히 해내는 지구인도 있기는 하지만, 몇 조각 먹고 나면 배가 불러 금세 치킨을 주문한 것을 후회하는 그런 존재도 있다. 어디에? 우리 집에! 나, 나!
치킨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그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탕수육이다. 평상시에 보통 탕수육만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짜장면이든 볶음밥이든 식사류 하나에, 당연히 요리류에서도 한 가지 음식을 더 주문한다. 밥과 반찬의 개념이랄까? 기왕 때우는 끼니 조금이라도 맛있게 해결하고 싶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식사류는 어떻게 한 끼에 해결되긴 하는데, 탕수육은 꼭 남는다. 다음 끼니에 먹으면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탕수육이 다음 날 먹을 땐 처음 접했을 때처럼 맛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다시 튀기기도 하고 오븐에 돌려먹기도 해봤지만 그래도 떠난 첫맛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가격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렇다고 애초에 탕수육은 시켜 먹지 마? 나도 매일을 맛있게 살고 싶은데!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통해 탕수육 살리기에 도전했던 ―금세 배가 불러 안타까워하던― 지구인은 드디어, 해결책을 찾아내고 말았다. 놀랍게도 이건 학교에서 학생들이 알려준 방법이다. 아, 물론 직접적으로 탕수육 활용을 설명해준 건 아니고 폐전구를 활용해 예쁜 화분을 만들어 자랑하는 해맑은 모습에서 찾아냈다. 아이들은 쓸 수 없는 전구를 전구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해진 이름을 떼어내고 나면 사실 폐전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소중한 재료일 뿐이었다. 전구는 반드시 불을 밝히는 용도로만 써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남은 탕수육은 꼭 다시 탕수육으로 원상 복귀시켜야 한다는 편견을 버린다면, 탕수육도 얼마든지 새로이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온갖 중국집 메뉴와 인터넷 블로그를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 그 이름도 찬란한 유린 탕수육! 당신의 입맛을 유린하겠어!
남은 탕수육은 기름에 튀겨준다. 너무 오래 튀기면 딱딱해질 수 있어서 중간중간 계속 확인해주어야 한다. 이때 느끼함이 올라온다는 단점이 있어서 이를 잡아주어야 하는데, 냉장고에 있는 온갖 채소들이 쉽게 해결해줄 것이다. 양파, 피망, 오이, 대파, 알 배추에 토마토까지 몽땅 다져준 다음 재료들을 전부 유린기 소스에 푹 담가주면 된다. 유린기 소스? 갑자기? 절대 어렵지 않다. 간장, 식초, 물을 1:1:1 비율로 섞고 설탕만 입맛에 맞게 추가해주면 완벽한 유린기 소스가 만들어진다. 그야말로 마법의 소스! 신발을 담가도 맛있을 것 같…….
원래 유린기는 ‘기름을 뿌린 닭고기’라는 의미이며 갖은 채소 위에 튀긴 닭고기를 올리고 새콤한 간장소스를 부어 먹는 음식이다. 유린기의 ‘기’가 닭을 의미하는데, 탕수육을 깔았으니 유린 탕수육, 이렇게 부르면 되지 않을까? 여하튼 새로 튀긴 탕수육 위에 채소를 넣은 유린기 소스를 부어주면 시체도 군침 흘릴 유린 탕수육의 완성이다. 이 유린기 소스는 튀김의 느끼함을 잡아줌은 물론 바삭함과 촉촉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연히 갓 튀긴 고기 위에 소스를 올려 먹는 게 가장 맛있겠으나 남은 탕수육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런 메뉴가 존재하고 있었을 줄이야! 결과적으로 유린 탕수육에 도달하게 해준 아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들아, 고마워! 내가 사줄 순 없고, 너희들도 탕수육 사 먹어!
어른들은 대상을 바라볼 때, 특히 아이들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이 없다. 꼭 ‘평가’를 한다. 그리고 여러 평가 기준 중 하나는 꼭 ‘성적’이다. 한없이 착하고 예쁜 아이를 보면서도 ‘착한데 성적은 별로인 아이’, ‘성적도 좋고 예쁜 아이’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한달까. 사실 아이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계가 있지 않다.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게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아이가 가진 성적, 배경 따위가 아니라 정말 아이 그 자체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지구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특히나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자꾸만 나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됐달까? 부끄럽기도 하다. 학생이라면 으레 공부해서 대학을 가야 한다는, 그게 학생으로서의 도리라는 편견은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는다. 다른 잠재력을 지녔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만 강요하곤 했다. 학생이 아니라면, 나와 다를 게 없는 ―다만 나이가 조금 어린― 지구인일 뿐인데…….
남은 탕수육을 어떻게든 탕수육으로 원상 복귀시키고자 했다면 결코 유린 탕수육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결과물은 원하는 대로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세계가 정해놓은, 마치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편견을 버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대상이 가진 문제가 보이고 대상이 가진 가능성이 보인다. 아이들도 그렇다. 대학이 아니어도,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모든 지구인이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스스로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뻗어나갈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기도 했다. 그 상상력은 자신의 미래를 펼치는 데에도 작용하겠지? 어른들이 간섭하고 방해하지 않으면 더 멋진 세계를 알아서 꿈꿀 테니, 탕수육을 강제로 먹일 게 아니라 탕수육 사 먹을 돈만 쥐여주면 딱 맞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아이들은, 탕수육 대신 다른 재료들을 사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당신의 입맛을 유린할지도 모른다. 그저 어른들은, 응원하며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