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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숭깊은 라쌤 Jul 26. 2024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있듯

어쨌거나, 맨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있듯 

-그날베컴의 프리킥 궤적은 나를 향했다       


   

누구에게나 첫 경험이 존재할 것이고, 그 경험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가슴에 더욱 짙게 새겨질 것이다. 그날,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 궤적은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내게로 왔다.     


20여 년 전 일이니 고등학생이었던 건 분명하고, 또 하나 분명한 건 당시 나의 관심사는 공부나 성적, 대학 따위가 아니었단 점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오직 친구들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친구가 친구로 여겨지기 위해선 반드시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 동료 중에도 그냥 평범한 동료인 이들이 있고,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게 된 사이가 따로 있다. 나이나 성별 따위보단 ‘서로 통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조건이란 건 아마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에겐 서로를 연결해주는 강력한 매개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축구’였다. 

언제나 우린 방과 후 집이나 학원 대신 학교 운동장을 지켰다. 어떻게? 축구, 오직 축구! 날이 좋아서 혹은 좋지 않아서, 컨디션이 좋아서 혹은 좋지 않아서, 배가 고파서 혹은 배가 불러서 축구 시합을 했고 공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11대 11? 3대 3도 문제없어!     


미쳐야 미친다고 했던가, 꿈이 없던 내가 스포츠 기자가 되어 월드컵 취재를 나가고 싶단 생각까지도 했으니 얼마나 축구에 빠져 있었는지는 아마 상상 이상일 것이다. 지금이야 다른 직업의 삶을 살고 있으나 정말 그렇게도 살아보고 싶단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쨌거나 축구에 빠진 고등학생은 국가대표 경기뿐 아니라 클럽팀의 경기도 중계해주는 채널이 존재함을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되었고, 모두가 잠든 새벽녘 몰래 거실로 나와 TV를 틀었다. 혹자는 새벽에 축구를 왜 하냐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을 테지만, 정말이지 한밤중에 TV에선 축구 중계를 해주었고 이건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날의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우리나라 경기장에서 화려한 플레이로 관중들을 홀렸던 장면들을. 피구, 지단, 호나우두,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까지. 물론 베컴은 우리나라에서 경기는 안 한 것 같지만 하여간에 그들을 한 경기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데 이걸 안 본다고? 새벽 3시? 4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잠이야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자면…….     

부모님이 깨시면 안 되니 볼륨은 최대한 낮게, 그리고 MBC인지 MBC ESPN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중계해주는 채널을 찾아 틀고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경기에 집중했다. 자, 그리고 경기 내용은 생략! 축구 경기 설명서가 아니므로 딱 한 가지, 중요한 사실만 언급하자면 그건 바로 베컴의 환상적인 프리킥. 상대 파울로 얻게 된 프리킥 상황, 아크 써클 조금 앞에서 찬 베컴의 슛은 그림 같은 곡선을 그리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돌아오더라도 중력이니 질량이니 에너지와 공간, 시간의 결합이니 하는 개념들을 들이대지도 못할 궤적이었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이었으니까. 예술 작품을 마주한 순간 느껴지는 감정, ‘아름답다’란 말이 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데이비드 베컴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내게로 왔다. 

     

맨유 로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페이지 갈무리


이때부터 새벽에 축구 경기를 하는 이상한 나라의 축구 리그에 푹 빠지게 되었고 주말 예능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EPL을 더 즐겨보는 사내가 되었다. 강렬한 첫인상으로 인해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날 프리킥의 주인공이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에서 뛰는 중동 선수의 골이었으면 난 지금 아랍어를 통달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날 프리킥이 축구 경기가 아니라 미식축구에서의 프리킥이었다면 난 지금 우락부락한 고릴라의 몸집을 지녔을지도…… 아, 이건 아닐 수도 있겠다.      


결국은 ‘아름다움’이다. 첫 키스의 추억이 날카로운 이유는 한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지구인의 기억 속에 그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영원토록 머물 것이다.      


어쨌거나, 맨유와의 첫 만남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내겐 너무도 강렬했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날카로운 첫 키스, 아니 아름답고 강렬한 추억은 무엇인지. 이 이야기로 인해 당신의 기억 속 아름다운 장면들이 문득 솟아나 당신이 미소 짓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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