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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Jul 05. 2021

스케치 - 건축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습관, 정확히는 제가 만들어온 습관들에 대해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만, 역시 그림 그리는 것, 스케치하는 습관을 먼저 말씀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저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 이 스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전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심지어 대학교 때도 ‘게임 회사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수 없을까’를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건축에서 그리는 스케치는 일반적인 그림과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고 건물의 조형과 공간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물화보다는 정물화나 풍경화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들마다 스케치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붓펜으로 건물의 큼직큼직한 흐름과 컨셉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건축가들도 있고, 얇은 펜으로 세밀하게 공간이나 재료의 디테일을 표현하는 건축가들도 있습니다. 마치 화가들이 각자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최근에는 건축 설계에도 컴퓨터가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스케치를 활용하는 빈도는 점점 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케치업이나 라이노 등의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컴퓨터 안에서 가상으로 건물을 올려볼 수 있고, 이것을 브이레이나 루미온 등의 렌더링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마치 실사와 같이 실감나는 화면으로 전환해서 실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컴퓨터 툴이 워낙 좋아졌기 때문에 스케치나 모형 제작 등의 수작업을 활용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하게 되면 시간도 너무 많이 들고 어차피 컴퓨터로 다시 해야 되기 때문에 번거롭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최근에 젊은 직원들이나 학생들은 수작업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저만 해도 그런 학생과 직원 중 하나였습니다. 작업을 컴퓨터로 하다 보니 어느덧 수작업은 하지 않게 되어버렸죠. 사실 수작업에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았구요. 교수님들이나 고참 소장님들이 ‘컴퓨터로 바로 하지 말고 손으로 먼저 그려보고 해라’라고 해도 그냥 옛날 분들이 하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사실 이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컴퓨터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스케치이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조형에 대한 어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컴퓨터를 꺼내 들고 모델링을 하거나 도면을 그리긴 힘듭니다. 하지만 연필과 스케치북이 있다면 그것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계속 스케치를 하다보면 좋은 공간과 조형을 만들어내는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컴퓨터를 켜고 모델링을 하긴 힘들지만 매일 매일 스케치북을 펴서 그림을 그리긴 쉬운 거죠. 이런 이유에서 앞으로도 디자인 계열의 일에서 손으로 하는 스케치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회사에서 퇴사를 생각할 때쯤, 저만의 강점을 가지려면 어떤 걸 해야 할까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생각한 것이 블로그를 해보자 라는 것이었는데요. 이 블로그에 어떤 컨텐츠를 넣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스케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 거죠. 사실 그때까지도 전 그다지 건축 스케치를 자주 하지도, 잘 하지도 못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그려왔던 그림과 건축 스케치는 결이 많이 달랐던 것이죠.


그 때 제가 스케치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분들은 이타미 준 건축가와 박승홍 건축가입니다. 2011년에한 타계 이타미 준 건축가는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하신 재일교포 출신 건축가입니다. 제주도에 지어진 방주교회, 물의 교회, 포도 호텔 등의 작품들이 유명합니다. 이 분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세밀하게 묘사된 스케치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거의 미술 작품 수준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저도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막연하지만 ‘아, 나도 이 정도 스케치과 건축 작품으로 내 전시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승홍 건축가는 디자인캠프 문박 디엠피의 대표 건축가입니다. 역시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스케치로 유명합니다. 건물의 설계 과정을 스케치만으로 풀어낸 듯한 다수의 스케치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스케치를 참고 삼아 저도 저만의 스케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루에 한 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두 세장 정도는 스케치를 하려고 했고, 그것들을 꾸준히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은 150개 정도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축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그린 것도 있고, 제가 존경할만한 건축가의 작품을 따라 그린 것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냈던 아이디어를 그린 것도 있고 아쉽게 채택이 되지 못한 것들을 스케치로 남긴 것도 있습니다. 디테일 도면을 따라서 그린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스케치를 시작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일단 앉아서 뭐라도 그려보자 하고 끄적 끄적 하면서 시작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뭔가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림을 그릴 일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냥 그리다보면 뭔가 떠올라서 계속 그리게 되는데요. 그러기에 최소한 일주일에 한 개 이상은 스케치를 합니다. 하루로 치면 10분, 15분이라도 시간을 내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개를 완성시키려고 하면 부담이 되기 때문에 다만 10분이라도 시간을 쓴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아, 이번 건 별로다. 그냥 포기해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접으려고 한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연필로 한 스케치의 장점은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 묵혀두었다가 다시 보면 ‘이렇게 수정하면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그렇게 다시 붙잡고 그리다보면 그럭 저럭 봐줄만한 수준이 돼서 완성한 적이 많습니다. 이렇게 스케치를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완성하는 습관이 생겼고 이것이 실제 실무 작업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스케치를 열심히 한 이후부터 건축물의 메스 형태, 입면구성, 공간을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요. 사실 거의 모든 건축직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업무를 열심히 하시지만, 실제적인 디자인 작업은 프로젝트 초기에만 집중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이 후속작업인 세부도면 작성이나 각종 문서 작성 등 부차적인 일에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 디자인에 대한 감각을 기르거나 연습을 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하는 꾸준한 스케치는 이러한 감각을 기르고 연습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사 그것이 실제로 건물로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저는 이 스케치를 주기적으로 하기 위해서 ‘스케치 모임’도 하나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혼자 하는 것 보다 아무래도 몇 명이라도 모여서 약속을 하고 공유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멤버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 개 이상 스케치를 올리는 것으로 하여 진행 중인데요. 다른 건축가분 두 분과 일반인분 한 분이 참여해주고 계십니다.  


제가 하는 스케치는 세밀한 펜으로 하는 디테일한 스타일은 아닙니다. 다소 거친 연필선으로 메스와 음영, 창 등을 표현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색연필로 하늘의 파란색, 나무의 녹색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 식으로 작업을 하곤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이타미 준이나 박승홍 건축가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요. 오래 하다 보니까 그분들 스타일과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저만의 스타일이 생겼다고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쯤 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스케치를 하면서 저는 조선시대 막사발을 만들던 도공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조병수 건축가의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당시 도공들은 하루에도 몇 십개씩 그릇을 만들고 깨뜨리곤 했다고 합니다. 사실 하루에 몇 십개를 만드려고 한다면 한 작품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완벽한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 보다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많은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양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건축 작업은 건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명한 건축가라고 하더라도 완성작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실제적인 경험이 적다는 단점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스케치로 그런 건축설계의 단점을 커버해보고자 합니다. 스케치로 설계하는 것은 돈도, 시간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작지만 하나의 건물을 빠르게 디자인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계속 스케치를 하고 저만의 건축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저의 건축 언어인 ‘단순함 속의 단단함’을 구현해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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