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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Aug 29. 2020

건축에 대한 모순적인 생각들

‘꼬르뷔제’는 맞고 ‘임대표’는 틀렸다?

얼마 전에 나는 ‘갑질’ 건축가에 대한 글을 썼다. ‘임대표’라고 불리는 건축가가 설계해서 한남동에 최고급 주거건물이 지어졌는데 하자가 너무 많아서 입주자가 도저히 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아무리 건축설계가 좋고 건축철학이 좋아도 그런 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집의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되어야 건축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한 글을 보고 빌라 사보아의 하자가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름에는 비로 인한 누수와 곰팡이가 폈고, 겨울엔 너무 추워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1~2년도 아니고 9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건축주인 사보아 부부의 자녀가 폐결핵으로 목숨까지 잃게 되자 문제는 정말 심각해졌고, 꼬르뷔제는 이로 인한 소송까지 겪게 되었다. 때마침(?) 터진 세계 2차대전 덕분에 소송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빌라 사보아는 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예전에 나도 빌라 사보아에 대한 글을 썼었다. 다소간의 하자가 있더라도 꼬르뷔제의 혁신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시도를 폄하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한남동 주거시설에 대해 썼던 글과 서로 완전히 상반된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철학과 디자인이라도 거주자가 제대로 살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거주자가 하자로 9년 동안이나 고통을 겪었고, 건강을 잃었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집의, 나아가 건축의 기본적인 의무를 전혀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 건축 최고의 거장이 무슨 소용이 있고 건축의 5원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꼬르뷔제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하지 않을까? 건축주를 ‘건축실험’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건축주에게 병이 있었던 것이고, 다만 빌라 사보아는 조금 악화시킨 정도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


나에게, 더 나아가 모든 건축가들, 건축학도들에게 꼬르뷔제와 빌라 사보아는 ‘신화’와 같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하자에 대한 변명을 찾게 되었고 ‘하자나 기타 시행착오를 두려워해서는 혁신을 할 수 없다’라는 식의 글을 쓰게 되었다. 확실히 지금도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보수적인 쪽이 맞다는 생각이다. 혁신적인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실현과정을 좀 더 꼼꼼히 챙기고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좀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다른 전문가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눠서 앞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준비해야 한다. ‘이만큼 새로운 시도를 했으니 다소간의 하자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인드는 건축가로서 굉장히 무책임한 것이다. 꼬르뷔제도, 미스도 이에 대해선 일말의 여지 없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말이다.  

20세기의 거장들이 건물을 만들던 시절과 지금의 건축 기술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혁신적인 디자인, 앞서가는 디자인’을 빌미로 하자가 넘치는 건물을 만든다면 더더욱 용서받기 힘들 것이다. 그런 것들을 막기 위해 기술이 있는 것이다. 공부하는 건축가, 책임 있는 건축가, 시공사와 협력하는 건축가가 ‘디자인’과 ‘하자 없는 시공성’을 두루 갖춘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건축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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