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근에 생각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굉장히 거친 구분이 될 수도 있는데, ‘창조적인 건축가’와 ‘일관성 있는 건축가’의 구분이 그것이다. 창조적인 건축가라 함은 프로젝트의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른 대응방식을 통해 독창적인 해법을 찾는 건축가를 말한다. 렘쿨하스나 도요이토같은 경우가 이런 분류에 속하는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일관성있는 건축가라 함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건축언어를 거의 매 프로젝트마다 빠짐없이 적용하면서, 그것을 마치 장인과 같이 발전시켜가는 유형의 건축가를 말한다. 안도 다다오나 알바로 시자와 같은 건축가가 이러한 유형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떠한 방식이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건축은 매 프로젝트마다 주어진 사이트가 다르고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해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자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언어가 반복되는 후자의 건축이 가능한 것은 결국 건축설계라는 것이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한 인간이 계속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지속적으로 머리에 담고 있는 생각이 건축에도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대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건축가가 하나의 건축언어를 선정했을 수도 있다.
무엇이 좀 더 어려운가라고 한다면 전자가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매번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창조적인’ 건축가들조차 비슷한 언어가 반복되는 성향을 보일 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두 개의 가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창조적인 건축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일관성이 부족한 중구난방식 건축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일관성 있는 건축이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갇힌 자기복제의 건축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근대건축을 일으킨 르꼬르뷔제나 미스, 루이스 칸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있는 건축가의 계열로 볼 수 있다. ‘건축의 5원칙’으로 대변되는 일관된 건축언어로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건축을 이식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누가 보더라도 자신의 건축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건물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후기 르꼬르뷔제 같은 경우 다른 흐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렘 쿨하스를 위시한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이 이른바 ‘다이어그램 건축’을 들고 나오면서 ‘창조적인 건축’으로 프레임이 전환된다. 다이어그램을 통해 명쾌한 건축적 해법을 제시하고, 그것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BIG(비아케 잉겔스)를 기점으로 다이어그램 건축의 시대가 어느 정도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는다. 더 이상 명쾌한 다이어그램을 무기로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건축설계라는 분야가 그만큼 보수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분야이다 보니 ‘하던 방식이 최고’라는 흐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면 루이스 칸이 말했던 ‘변하지 않는 건축의 본질’이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가로서의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이다. 나는 정확히는 현 시대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풀기 위한 방법론들을 ‘일관성’있게 추구하고 싶다. 현재의 관심사는 ‘동시대성’과 ‘한국성(지역성)’ 정도가 될 것 같다. 매 프로젝트마다 완전히 다른 창조적인 접근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건축가로서 동시대에 대한 일관적인 생각과 신념을 표출하는 것이 좀 더 필요하고 강력한 접근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심지어 앞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 나의 고민을 정리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