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공모전 # 02
여기는 I대 건축과 학생, 이지수의 집이다.
“지수야, 이제 자야지. 아직도 안자고 뭐해?”
12시가 넘은 시간. 빵집 영업을 마친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 지수와 지수의 아버지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원래도 몸이 약했던 지수의 어머니는 오래 전 프랑스에서 지수를 낳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지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22살 평생을 거의 다 아버지랑 살아온 셈이다.
“네, 이제 자려구요. 이제 오세요. 일이 많으셨나 봐요.”
“뭐, 이것저것 정리할 게 있다 보니.. 내일부터 학교 나가야 되지 않아?”
“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생각이 많다보니. 얼른 주무세요.”
건축과 4학년이 된 지수는 고민이 많다. 이제 4학년. 다른 과 학생이라면 졸업과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지만, 건축학과는 5년제라 1년이 더 남긴 했다. 하지만 나이는 똑같다. 슬슬 졸업과 취업이 걱정되기 시작하는 지수이다. 아버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않으시지만, 딸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이 많으신 눈치다.
설계수업은 그럭 저럭 재밌게 듣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내가 정말 설계를 할 만한 사람일까에 대한 확신은 없다. 아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자신감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지난 학기에 했던 집합주택 프로젝트. 몇날 며칠 날밤 새가며 정말 열심히 했지만 받은 성적은 B+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에이를 받지 못하다니..’ 나름대로 정말 최선을 다했던 지수는 정말 크게 실망했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다른 친구들이 설계 작품을 자랑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정말 설계를 해도 괜찮을까? 나보다 잘 하는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가뜩이나 사회에 나가면 버티기 더 힘들다는데. 지금이라도 다른 걸 알아봐야 하지 않나? 그래도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게 있고, 난 그래도 설계가 재밌는데.. 내일 수업이 10시지. 이제 진짜 자야겠다..’
띠리리.. 또 다른 건축과 학생, 최창민의 핸드폰이 울린다.
“창민아, 나 민준인데. 내일 설계 수업 첫날이잖아. 수강 신청 어느 교수님으로 했어?”
“김지현 교수님이 주임 교수님이니까 아무래도 낫지 않나? 1,3반에 들어오시니까 1반으로 신청 했는데.”
“그렇구나. 나는 3반으로 했는데. 이번에 새로 오시는 최예린, 정수현 교수님 있잖아. 저번에 젊은 건축가상 탔다는데. 이번에 2반이잖아.”
“아 맞다. 그 분들이 새로 오신다고 했었지.”
“그 사람들, 상도 타고 좀 기대되지 않아? 원래 계시던 분들보다 참신해 보여서. 그쪽 반 학생 수가 좀 부족해보이던데. 내일 아마 인원 수 조정을 좀 할거 같아. 난 여차하면 그리로 갈 생각도 있어서.”
“아 그래. 나도 생각 좀 해봐야 겠네.”
“난 교수님보다 너한테 더 배우는 거 같은데. 너랑 같은 반이면 좋은데. 이번 학기에도 잘 부탁한다.”
“에이 왜 이래. 설계는 다 알아서 하는 거지."
친구 민준의 말대로 창민은 I대 건축학과 최고의 에이스다. 이미 2학년 때부터 각종 모델링, 렌더링, 그래픽 툴을 수족 다루듯이 능숙하게 다뤄서 교수님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3학년 때부터 각종 공모전에 나가 입상을 밥 먹듯이 했다. 이미 방학 때마다 교수님들이 창민을 불러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작업을 시키곤 했다. 지난 겨울에 나갔던 공모전에서도 2위를 했다. 아깝게 대상을 놓쳐서 내심 굉징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지난 학기 설계 점수는 당연히 A+이다. 그 전 학기, 그 전 학기에도 전부 A+이다.
‘그래. 그 사람들이 젊은 건축가상을 탔다고 했지. 왠지 마음이 그리로 가는데.. 그래도 주임 교수가 아무래도 낫지 않나. 내일 상황 봐야겠다.’
“그래, 내일 보자 민준아. 이번 학기도 잘 해보자.”
여기는 작은 건물 지하의 한 연습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몇 명의 여학생들이 춤을 추고 있다. 아이돌 그룹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숙련된 솜씨다. 2시간의 격렬한 연습이 끝나자 한 명이 음악을 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얘들아. 오래 했더니 조금 힘드네.. 모두 수고했어.”
“그러자. 나도 내일부터 수업 시작이라. 지금처럼은 계속 못할 것 같아.. 미안해.”
“오디션 날짜 많이 안 남았는데.. 미나야, 개인 연습이라도 열심히 해줘.”
“알았어. 다음 연습 때 보자.”
짐을 정리해서 문을 열자 몇 명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
“미나 언니.. 고생 많으셨어요. 이거 받으세요..”
“이런 시간까지. 고마워 얘들아. 이제 그만 들어가.”
“미나 언니 빨리 데뷔하셔야 되는데. 그때까지 꼭 응원할게요..”
“그래, 고맙다 얘들아. 니들 봐서라도 내가 꼭 데뷔해야 되는데..”
I대 건축과 4학년인 손미나는 예비 아이돌 내지는 준 아이돌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최종 30위까지 갔던 전력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곧 데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소속사의 경영이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망해버리고, 준비하고 있던 미나의 데뷔 프로젝트도 전부 무산되고 말았다. 졸지에 진로가 막막해진 미나에게 친척 큰아버지가 제안을 했다. 큰아버지는 서울에 제법 큰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미나가 무슨 건축과에 가든 졸업만 하고 오면 바로 취업을 시켜 주신다고 하셨다. 외모도 물론 출중했지만 공부도 곧잘 했던 미나는 뒤늦게 편입을 준비했고, 행운도 꽤 따라주어서 수도권에 괜찮다고 평가받는 I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학교를 다녀 보니 건축과는 그렇게 설렁 설렁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선 건축설계라는 과목의 과제량이 엄청났다. 졸업은 하고 보자 라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다니고는 있지만, 영 체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돌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해, 알고 있던 몇몇 지망생들을 모아 연습을 계속 하면서 오디션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학교 수업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도는 떨어지고, 지지부진한 느낌이다. 예전에 꽤 유명했던 준 아이돌이기 때문에, 아직도 팬들이 이렇게 찾아오곤 한다. 화려한 외모 덕분에 학교에서도 엄청난 유명인이다. 항상 남학생들이 따라다니고, 선물 공세를 받곤 한다.
‘이제 내일부터 개강이구나.. 그 힘든 설계 수업을 또 들어야 하나. 지난 학기에도 겨우 들었는데. 누구 하나 빌붙을 만한 애가 없을라나.. 에휴.’
힘겹게 듣고 있는 설계 수업에 큰 애정이 없는 미나. 지난 학기 설계 점수는 B0이다. 연습을 펑크내면서 정말 간신히 마감했었다. 말 그대로 어떻게든 졸업이나 하고 보자는 심정이다.
서울의 한 고급 저택. 주말 연속극을 찍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식탁에서 한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민호야, 내일부터 개강이지.”
“네, 아버지. 이제 방학도 다 끝이네요.”
“그래. 학점은 잘 만들고 있지?”
“그럼요. 지난 학기 학점도 거의 만점인데요.”
“그래, 잘 하고 있구나. 어차피 넌 유학갈 거긴 하지만.. 학부 점수도 무시할 순 없으니까. 지금부터 기초를 잘 닦아 놔야 돼. 영어 공부도 착실히 해야 되고.”
“알겠어요. 과외 수업도 잘 받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I대 건축과 4학년 강민호는 I대 설립자의 손자다. 할아버지는 은퇴하시고, 아버지가 현재 I대의 이사장을 맡고 있어 현실적으로 I대를 경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로열 패밀리라고 할 수 있다. 건축과는 I대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키우고 있는 학과였다. 민호의 아버지는 민호를 장차 건축과 교수로 키우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대를 이어 이사장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서울의 명문대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I대에 진학하도록 하여 소위 ‘정통성’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학벌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미국 명문대 유학으로 메꾸면 그만이었다.
민호는 집안도 부자인데다 외모도 출중해서 학교에서 귀족 대우를 받고 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추종’하는 학생들도 제법 많고 좋아하는 여학생도 정말 많다. 마치 ‘꽃보다 남자’의 F4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저번 학기 성적은 전반적으로 잘 나왔지만, 설계가 A0였던 게 좀 맘에 걸리네.. 그것만 잘했으면 정말 퍼펙트였는데. 어쩌다 교수한테 약간 밑보여 가지고.. 이사장 아들인거 알았을 텐데 그렇게 주다니. 아무튼 이번 학기는 어떻게 해서든 A+을 받아야 되겠어.’
“설계 강의하는 교수는 괜찮니? 이번 학기는 누구한테 들어?”
“일단 주임 교수인 김지현 교수님 반을 신청해놨어요.”
“그래, 너야 누구한테 듣든 잘 할테니까. 학교 다니는데 어려운 거 있음 바로 바로 이야기하고.”
“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렇게 설계 수업을 듣는 4명의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과 고민을 가지고 방학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예린과 수현의 사무실. 예린의 전화가 울린다.
“예린아, 나 지현이. 내일 수업 얘기 좀 하려고.”
“아, 그래.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몇 시 까지 가야돼?”
“내일은 10시부터 수업 시작이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랑 교수님들 소개, 학생 인원 배분 같은 걸 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저번에 보내준 자료 봤는데, 프로그램이 도서관이지?”
“어, 일단 매년 하던 사이트인데.. 학교 주변이니까 인터넷으로 좀 살펴보고 오면 돼. 대지 답사는 다다음 시간에 할 테니까. 내일은 그냥 교수 소개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와도 돼.”
“그래, 알았어. 남편 데리고 갈게.”
“바쁘면 한 명만 와도 되는데.. 다른 반도 한 분만 오실 거거든.”
“아냐, 처음 하는데 열심히 해야지. 잠깐 인사하는 거면 둘 다 가는게 낫지.”
“굳이 그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하하. 암튼 알았어. 내일 보자 예린아.”
수현과 예린도 내일 수업 참석을 앞두고 약간 들떠있다. 둘 다 졸업한 지 15년도 더 되었으니 정말 오랜만에 ‘개강’이라는 것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