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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10. 2024

스타크래프트 경기 중 단 하나를 꼽는다면?

약간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난 20대 때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을 참 좋아했다(아마 안 좋아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 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경기 중계를 좋아했다. 중요경기는 빠짐없이 챙겨봤고, 특히 임요환을 좋아했다.



10여년을 이어지던 스타크래프트 중계는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아프리카 등의 마이너 채널에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예전처럼 메이저 게임 채널에서 다뤄주거나 하지 않는다. 한때 참 재밌게 보던 사람으로서 아쉬운 일이지만, 컴퓨터 게임 하나가 이십년 삼십년 이어지기도 어려운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수많은 게임이 있었고, 명경기가 있었다. 지금도 유투브를 보면 쉽게 그때 경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아라.. 고 한다면 난 이 경기를 꼽고 싶다. 6.20 이라고 불리는 홍진호와 김택용의 경기다. 지금도 생각날 때 가끔 찾아볼 정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경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단 이 경기가 왜 명경기냐.. 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그라운드가 되는 당시 상황, 선수들의 경력 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경기의 내용 자체는 그냥 저그가 대규모 드랍공격으로 승부를 걸어서 성공했다는, 어찌보면 그냥 평범한 경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배경, 선수들의 상황 등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경기는 도저히 평범할 수 없는 경기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보고 추억하는 경기가 된 것이다.



먼저 홍진호란 선수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폭풍저그'란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테란의 황제' 임요환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스타판 초기의 인기를 주도하던 최고의 스타였다.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경우가 많고 결국 선수경력이 끝날 때까지 우승을 하지 못해서 '2등'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2가 그를 상징하는 숫자가 되어 버렸고 그의 별명인 '콩'에서 비롯된 '콩라인'이라는 말이 2등만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어 버렸을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가 지금은 가장 성공한 스타크래프트 게이머 출신 연예인이 되었다. 심지어 '무한도전' 식스맨의 후보가 되었을 정도다. 포커 플레이어로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고, 가끔씩 예능에 얼굴을 비추면서 '2등의 아이콘'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시절 2등만 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최근 들어 더 잘나가는 듯한 느낌의 홍진호다. 



내가 거론하려고 하는 이 6.20 경기 당시 홍진호의 상황은 대충 이러했다. 당시 공군 에이스라는 팀이 있었는데, 소위 '한물 간' 프로게이머들을 받아서 병역 문제를 해결해주던, 일반 스포츠로 치면 '상무' 같은 팀이었다. 프로게이머의 전성기는 굉장히 짧다. 기껏해야 10대 말 ~ 20대 초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인데, 이 시기만 지나도 '올드 게이머', '퇴물'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소속팀에서 기량이 떨어져 전성기가 지난 홍진호는 공군행을 선택하는데, 공군에 들어가서도 계속 져서 거의 2년이 넘도록 한 번도 승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말 그대로 한물 간, 그야말로 잊혀져가는 옛날 게이머가 바로 홍진호였다. 



반면에 김택용의 상황은 정 반대였다. 원래 프로토스는 저그에게 약한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패러다임을 철저히 때려 부쉈다. mbc 게임 리그 결승전에서  '본좌' 마재윤(나중에 승부조작이 발각되어서 프로게임계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를 3:0으로 셧아웃 시키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 뒤로 최고의 팀인 sk t1으로 스카우트, 이적하면서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도 저그 킬러로서 최고의 승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날의 경기는 프로리그 경기였다. 개인들끼리 타이틀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팀끼리 5전 3선승제의 리그전을 펼치는 경기였다. 최약체라 불리는 공군 에이스와 최고 인기 구단이자 최강이라 불리는 sk t1의 경기였다. 어찌 보면 sk t1의 승리가 불을 보듯 뻔하니 이 경기에 대한 관심도는 그다지 높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저그전 최강이자 당대 최강인 김택용과 한물 가도 한참 간 옛날 게이머 홍진호와의 승부라니. 축구로 치자면 브라질과 한국 정도의 게임이 될 듯 하다. 그 정도로 전력 차이가 컸고, 누가 보더라도 김택용의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에는 중계진들도 힘이 빠진 듯한 중계를 했다.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김택용이 이기겠지..'라고 생각한 듯 하다. 



여기까지의 배경을 이해하고 이 경기를 봐야 한다. 이 상황을 모르고서는 왜 이 경기가 최고의 경기로 불리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말 그대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판, 소위 '스타판'을 좀 알아야 이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경기 초반, 홍진호는 김택용의 정찰 프로브를 빠르게 끊어낸다. 이것은 꽤나 큰 의미를 지니는데, 홍진호가 준비하는 빠른 히드라 - 럴커 드랍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홍진호는 먼저 럴커를 본진 그리고 멀티 쪽에 까다로운 위치에 버로우시켜 프로브를 일부 잡아내고 자원채취를 방해하는데 성공한다. 이쯤 해서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그 후 빠른 대규모 드랍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나 김택용은 꽤나 든든하게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본진 캐논과 리버, 그리고 질럿 등등 종합 선물세트를 갖추고 홍진호에 맞서는 김택용. 하지만 김택용의 리버 컨트롤이 원활하게 되지 못하고, 스캐럽 몇 방 쏘지 못한 채로 리버 2~3기가 그냥 날아가고 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본진에서 계속 병력을 실어나르는 홍진호. 순식간에 본진이 초토화되면서 넥서스까지 날아가게 되고, 졸지에 김택용은 멀티만 남아버리게 된다. 이 때쯤 되자 관중석의 함성은 하늘을 찌르게 되고, 중계진들의 샤우팅은 거의 락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가 된다. 오죽하면 해설자가 '너무 소리를 질러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승세를 굳힌 홍진호는 말 그대로 '승리의 뮤탈'을 띄운다. 공중병력을 막을 수단이 없는 김택용은 속수무책. 남은 히드라와 뮤탈을 몰고 멀티 진영으로 들어가자 김택용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GG(항복선언)을 선언한다. 



여기까지가 간단한 이 날 경기 내용의 요약이다. 이 날 경기를 보면 중계진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관중석의 관객들이 일방적으로 홍진호를 응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한일전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SK T1의 팬들조차 홍진호를 응원한다. 이것은 홍진호, 그리고 이날의 상황이 사람들의 올드 게이머에 대한 향수, 그리고 언더독에 대한 응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국 드라마를 보고 싶어한다. 비록 그것이 가능성이 매우 낮을 지라도 말이다.  스포츠라는 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낮은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항상 예상했던 강자가 이긴다고 하면 스포츠가 얼마나 재미 없을 것인가.  



한 때 최고였던 게이머. 하지만 지금은 한 물 간 게이머.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게이머. 그런 사람이 현재의 최강자를 꺾는다. 이것이 주는 희열이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이다. 물론 이 당시 홍진호가 김택용과 10판을 해도 1판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날 그 1판이 찾아온 것이다. 그만큼 홍진호가 치열하게 이 경기를 준비했을 것이고, 그 전략이 멋지게 먹힌 것이다. 



난 홍진호가 힘들 때마다 이 경기를 돌려본다고 말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이 경기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희열을 주고, 용기를 주는 힘이 있다. '비록 지금은 당신의 때가 아닐지라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너의 때가 올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 그리고 내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비록 지금 당신의 때가 아니라고 느끼더라도, 참고 인내하고 힘을 기르고 준비하면 마침내 당신의 때가 올 것이다. 세상이 당신을 알아봐줄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좌절하지 마라. 단 한 번의 기회라도 그것을 잡으면 된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은 것 뿐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칼을 갈고 준비하면 당신도 최강자를 꺾고 인정받을 날이 올 수 있다. 당신의 내일을 응원한다. 



아래 경기를 보시면 제 글을 이해하시기 더 편할 것입니다.



(136) 090620 신한 프로리그 08-09 5R 4주차 SKT-공군 3set 김택용-홍진호 - In 단장의능선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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