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사옥(현 공공일호)
대학로에 가면 유독 빨간 벽돌로 된 건물이 많다. 아르코 대극장, 아르코 미술관, 서울대 병원 연구소, 비교적 새 건물인 방송통신대학 건물까지.. 대학로가 '빨간 벽돌 거리'가 된 것은 건축가 김수근의 공로가 적지 않다. 그가 대학로에 다수의 건물을 설계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선호한 '빨간 벽돌'의 건물이 여러 개 만들어져 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 건축가의 힘이 거리의 풍경을 바꾼 사례라고 할 만 하다.
최근 들어 외장재로서의 벽돌이 다시금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의 벽돌은 구조재로서의 역할은 철근콘크리트에게 넘기고 온전히 치장재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김수근이 한창 활동하던 70~80년대에 벽돌은 저렴한 인건비와 재료비 때문에 많이 쓰이던 재료다. 김수근 이후 90~2000년대 건축계에서 벽돌은 옛날 주택이나 성당에나 쓰이는, 고리타분한 재료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러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따듯한 느낌 덕분에 각광받고 있다. 덕분에 빨간 벽돌로 대변되는 김수근 건축이 지금 보아도 그다지 구식처럼 보이지 않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세월의 변화가 만들어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김수근은 벽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었다. 천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벽돌을 선호했다. 동대문의 경동교회는 형태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음에도 벽돌을 사용했다. 평면적으로 꺾이는 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직적으로 삐딱하게 꺾이는 부분에 시공이 매우 까다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미문화예술회관은 그 규모부터가 압도적이다. 저 큰 건물을 모두 벽돌로 마감하려면 어마어마한 인건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김수근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공간사옥도 벽돌이다. 이쯤되면 김수근을 '벽돌 건축가'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벽돌에 이만큼 애정을 가진 이유는 아마 손에 잡히는 작은 재료들을 하나 하나 쌓아올려 만드는 수공예적 이미지, 그 작은 픽셀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단단한 메스감, 작고 아기자기한 건물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스케일감과 질감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구현해내고 싶어 했던 ‘한국적 모더니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가 벽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중에서도 오늘 거론하고 싶은 건물은 샘터 사옥(현 공공일호. 이 글에서는 샘터사옥으로 부르기로 한다)이다. 혜화역 2번 출구 부근에 위치한 6층(79년 준공당시 4층이었으나 2번의 증축과 리모델링을 거쳐 6층으로 증축함) 규모의 비교적 작은 건물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그런 조그만 근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건물에 감히 김수근 건축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애초에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 주변은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19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김수근에게 샘터사옥의 설계를 맡긴다. 김수근은 당시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대학로의 중심에서 공공과 함께 호흡할 공간으로서 샘터사옥을 상상하며 설계를 완성했다.
우선 대학로 큰 길에서 본 정면 파사드를 보자. 모듈에 맞춰 정연하게 창이 배치되어 있다. 창마다 오돌도돌하게 디테일을 주어 벽돌 건물의 묘미를 살렸다. 이 중 저층부의 처리에 눈길이 간다. 1~2층을 한 번에 덮는 세로로 긴 창호를 사용했고, 일부 구간은 창이 없이 막혀 있는데 흔적창같이 요철로만 처리하여 통일감을 주었다. 좌측의 계단은 2층으로 직접 접근하기 위한 외부계단인데,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 덩굴이 샘터 사옥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이며, 건물의 운치를 더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사실 과거 벽돌 건물의 묘미 중 하나는 아기자기한 디테일이다. 벽돌이라는 재료가 한 장 한 장을 쌓아가야 하는, 픽셀화된 재료라는 장점을 극대화한 것인데, 아쉽게도 최근 건물에는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보다 훨씬 올라버린 인건비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을 시도하는 벽돌공을 찾기조차 쉽지 않다. 예전에 벽돌은 석재나 금속 외장재들보다 싼 재료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지금은 인건비 덕분에 비싼 재료가 되어버렸다.
정면에서 볼 때 중앙으로 뚫려있는 필로티 공간이 이 ‘샘터사옥’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필로티 공간은 전면, 측면, 후면으로 세 갈래로 입구가 뚫려 있고, 별도의 문이 나 통제가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천장재와 창호 하부에 사용된 짙은 색의 금속재, 바닥에 사용된 고전적인 둥근 패턴 사고석 처리, 주변의 레벨차를 연결하는 계단과 램프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준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어머니의 자궁 같다고나 할까? 누구나 올 수 있는 대학로의 휴식처로서, 비가 왔을 때 피하거나 약속시간에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나에게 누군가 대학로의 중심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이 샘터사옥의 필로티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건물의 개방성은 계단으로도 이어진다. 나 역시 주변에서 회사를 다녔기에 이 샘터사옥을 비교적 자주 와봤는데, 2~3층의 화장실을 이용한 경험이 있다. 건물의 공공성을 강조했던 건축가와 건축주의 의지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 약간은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샘터사옥의 또 다른 특징은 격자보: 와플(WAFFLE) 구조다. 당시 높이 제한 법규가 엄격하여 그 안에서 4층을 만들기 위해서 통상적인 기둥-보 구조보다 보의 춤(높이)를 줄일 방법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등장한 것이 보의 사이즈를 줄이면서 개수를 늘린 와플 구조다. 우리가 가끔 먹는 와플 과자를 연상하면 그 형태를 이해하기 쉽다. 루이스 칸 등이 즐겨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2층의 스타벅스를 이용하면 천장의 와플 구조를 직접 볼 수 있다. 덕분에 각 층 층고는 2.7M로 계획할 수 있었고, 내부 공간은 2.25M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내부공간은 별도의 천장 마감 없이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는 방식이다.
샘터사옥이 79년에 준공되었으니 어느덧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만큼 여러 번의 변화가 있었는데, 84년 지하 2층에 파랑새 극장이 개관했고 2007년에 지하에 있던 기계실이 5층으로 이전하여 지하 2층에 파랑새 극장 2관이 생겼다. 2012년에는 김수근의 제자였던 승효상이 증축설계를 맡아 5층과 6층을 증축하였고 기존에 있던 샤프트 공간을 활용하여 엘리베이터를 놓았다. 2017년에는 부동산 관리, 투자회사인 공공그라운드에서 샘터사옥을 매입하여 조재원 건축가의 설계로 ‘공공일호’라는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1~2층 공간은 프랜차이즈 매장에 임대하고, 3~4층은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여러 문화 기업들이 공간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들의 리노베이션 작업을 보면 굉장히 조심스럽게, 원래 건물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거장의 건축이 가진 무게가 크기 때문이리라. 공간 사옥의 증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건물을 덧붙일 때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 유리를 주재료로 활용하여 증축부분의 존재감을 덜어내면서 새로운 느낌을 부여하고, 기존 건물과 최대한 잘 어울리도록 하는 것이다. 승효상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자신만의 색채를 제대로 드러내는 현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하나다. 그러한 승효상조차도 스승의 건물을 건드리는 증축설계에 있어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접근한 것 같다. 사실 승효상은 유리를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는 건축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축부분을 거의 대부분 커튼월과 같은 유리로 처리했다. 스승의 건물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샘터사옥은 내가 가장 자주 가본 김수근의 건축이고(정확히는 1층 스타벅스를 자주 갔었다) 그 만큼 애정이 있는 건물이다. 벽돌 건물 특유의 디테일과 건물의 공공적인 가치를 너무나 잘 드러낸 김수근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보아 주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듯이, 이 건물도 오랜 세월 보존되는 건물이 되었으면 한다. 건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대학로를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도 켜켜이 쌓인, 보물상자와도 같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참고한 사이트(이미지도 이곳에서 가지고 왔음을 알립니다)
https://brunch.co.kr/@info1vid/51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154365&memberNo=40088262&vType=V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