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희 Oct 23. 2020

샴푸보다 린스를 먼저 짠 인생

언젠가 뉴스에 바닷가 마을 ‘소래’가 나온 적이 있다. ‘소래’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했다. 그래, 내가 소래에 갔었지. 그때 소래에 가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니던 때, 석사과정 1년 차에 결혼을 하고 홀로 서울대 내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자연피임을 위해 2주에 한번 정도 경산으로 내려가 남편을 만났다. 그야말로 신혼 주말부부.

석사 2년 차의 어느 봄날 주말,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다. 아마 대학원 생활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말 재미있게 보냈고 늘 기억에 남는다. 그때 간 곳이 바로 소래다.

즐거웠던 소래 야유회가 나로서는 뼈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소래 야유회에 갔던 그 주말에 경산에 가지 않고 소래에 가는 바람에, 나의 자연피임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래에 갔던 그 주말은 비교적 임신가능성이 낮은 시기여서 남편을 만나러 가야 하는 주말이었다. 그런데 동기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경산으로 남편을 만나러 가는 대신에, 대학원 동기들과 소래에 갔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다음 주 주말에는 임신가능성이 높아 집에 가면 안 되는데, 남편의 강한 요구에 따라 경산 집에 가게 되었고, 덜컥 임신을 했다. 신혼에 자연피임에 의존한 것이 문제였다.

첫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석사논문을 써야만 했다. 입덧을 하면서 행정고시 2차 시험을 보았다. 불합격이었다. 석사 학위수여식을 며칠 앞둔 2월의 어느 날 첫째를 출산했다. 그리고 한번 더 남은 2차 시험을 본 것은 첫째를 출산한 그해 여름 어느 날이었다. 아이 젖을 떼지 못해서 어머님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서울의 모 대학교 행정고시 시험장에 갔었다. 어머님이 학교 벤치에서 아이를 업으시고 내가 시험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셨다. 점심시간에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다시 시험을 보러 들어갔었다. 정말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불합격.

첫 아이의 돌 무렵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고, 박사과정 재학 중에 두 아이가 더 태어났다. 공부와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힘든 시간을 거치면서, 여성의 경력 개발은 결혼 및 출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 원인이 여성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다는 인류학적 원인이든 여성의 임신 및 출산과 여성의 경력 개발의 병행을 지원하는데 미흡한 사회제도적 원인이든 말이다. 그러면서, 학교 다닐 때 결혼과 육아의 의미를 알려 주지 않은 은사님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은사님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때도 이미 결혼과 출산의 의미를 알려주는 정보는 충분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결혼, 임신, 출산은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직 나에겐 공부만이 전부였으니...

언젠가 머리를 감으면서 샴푸를 하기도 전에 린스부터 짠 적이 있다. 린스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린스를 손등에 발라둔 채 샴푸를 짜고 머리를 감는데 몹시 힘들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샴푸보다 린스를 먼저 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아이부터 갖게 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아가면서 매 순간순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간혹은 남편에게 불쑥 화가 나기도 하는데, 샴푸보다 린스를 먼저 짜서 고생했던 것이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 중에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가 생기기 전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었다면 그 이후의 나의 커리어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직장을 구한 뒤에 두 아이를 더 가졌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결혼을 하지 않고 석사과정 중에 맘껏 학교생활을 즐기고 직장을 잡았다면...

언젠가 동네의 멋진 인도를 걸으면서, 이 멋진 블록 위로 걸어갈 사회 구성원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개인적 수준에서 합리적인 선택이 집합적으로 모이게 되면, 그 결과는 재앙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여성의 출산 문제가 그런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합리한 선택을 했고, 많이 불편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세 명의 구성원을 배출한 것이다. 이제야 느끼지만, 내가 세 아이를 낳고 키운 것은 매우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매 순간 내가 느꼈던 것은 자책감이었다. 왜 나는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을까? 대학원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공부 마치는데 10년도 더 넘게 걸리고,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마음도 힘들게 하고.

의도치 않게 계획보다 일찍 생긴 첫째 아이는 이제 20대 청년으로 성장했다. 세 아이 모두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 4학년인 둘째는 최근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나의 뜻대로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나의 계획보다 더 멋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훨씬 더 큰 세 아이들 틈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이를 갖는 것 자체는 커다란 축복일 수밖에 없다. 공부를 마치는 것보다 먼저 아이가 생겼더라도,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앞두고 아이가 생겼더라도 이는 축복이다. 시험을 앞두고 임신을 했을 때, 그 여성 응시자가 임신과 출산을 모두 마치고 시험을 볼 수 있게 배려하는 제도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 당국에 내가 임신했으니 시험 응시의 기회를 다음에 부여해 줄 것을 요구해 보기라도 하였으면 하는 미련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미련도 아쉬움도, 2세 출산의 축복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여성이 샴푸보다 린스를 먼저 짜서 당황하고 있을 때, 사회가 그 린스를 안전하게 지켜주어 여성이 안심하고 샴푸를 마칠 수 있게 해 주는 것일 것이다. 여성이 어떤 상황에서든 임신과 출산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사회와 정부가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성 개인적으로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는, 물론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해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적절한 피임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자연피임’과 ‘자연피임에 협조한다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는 편이 좋겠다.

그때 소래에 가지 않고 경산 집에 갔다면, 그래서 한 주 뒤 임신 가능성이 높았던 주말에 남편을 만나러 가는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또는 자연피임에 의존하지 않고 확실하게 피임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샴푸부터 짜는 인생이 되었을까? 이제 모두 지난 일인데도 나는 문득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글은 '한양 문학 2020년 제10호 여름'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