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베토벤이 조카를 데리고 와서 돌보는 기간이다. 약 5년간 조카를 돌보면서 조카를 교육하고, 그의 재능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조카의 재능에 실망하고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작품을 쓰지 못하는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 여성의 일상이 아닐까.
B의 이력서에는 박사과정 수료 이후 3년간 시간강사 일을 하다가, 이후 4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경력 중단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모 대학의 교수 공채에 지원했는데, 공개 강의 시간에 이 4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심사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다.
아이가 다친 적이 있고, 이후 그다음 학기부터 B는 시간강사 일을 맡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스스로 사건을 분석해 보았다. 그중에 하나가 ‘그래 내가 왜 TV를 껐지? 실컷 보게 그냥 뒀더라면 그 사건이 안 났을 텐데’ 하는 것이었다. 즉, 아이들이 TV를 보게 내버려 뒀더라면 그런 끔찍한 사건은 피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B는 첫째를 데리러 가면서, 학원에서 돌아온 셋째를 TV에 맡겨 두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친 셋째를 달래 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몇 개월 후에 B는 셋째 아이의 눈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사시 성 약시’. B의 가족은 아이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다친 이후 강의를 모두 접고 있던 와중에, 대학교 은사님의 부탁으로 모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강의 하나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B는 그 강의를 계속할 힘이 없었다. 대학의 시간강사 일을 접고, 평생교육원 강의를 우연찮게 맡았고, 어쩌면 그렇게라도 B는 경력을 지속할 수도 있었지만, 도저히 그 강의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 강의는 야간 강의였고, B가 야간 강의하는 사이에 또 TV 앞에 앉아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례를 무릅쓰고 B는 도중하차했다.
이후 B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해 오던 강사 일을 일절 하지 않았다. B 스스로 직업적 성장을 멈춘 것이다. 아이들 돌보는 일과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서 귀가하기 전에 박사학위논문 작성하는 일만 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논문 작성하는 일의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렀고, B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교수 공채 심사를 맡았던 대학교의 현직 교수님들의 눈에는 이 4년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5세, 7세, 9세 아이들을 돌보면서 4년간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도, 교수님들은 B가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고시공부를 했느냐고 어떤 교수님은 B에게 질문했다. B 입장에서는 어린 세 아이를 돌보면서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끝낸 일이 기적 같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성의 취업률이 30대 내지 40대에 뚝 떨어지는 현상을 가리켜 M자 곡선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양성평등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형태는 여전히 M자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은기수, 2018). 20대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은 상태였다가 결혼과 출산을 겪게 되는 연령대가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급격히 줄어든다. 이후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다시 높아지는 것이다.
B 역시 30대에 둘째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셋째 아이의 눈에 문제점을 뒤늦게 발견하는 등의 힘든 순간을 거치면서 드디어는 일을 놓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될 것 같다. 자신이 하는 일의 기회비용이 너무 커질 때, 경력 중단이든 경력 단절을 결정하는 것 같다.
남편도 물론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편들은 대체로 가정생활이 직장일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가정생활이 직장일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더 크게 느낀다(김유경·구혜령, 2016). 남편들은 우리 여성의 경력 중단 또는 단절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들이 아무 문제없이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기꺼이 경력을 단절하기로 결정하는 또는 가정과 자신의 경력을 모두 해 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아내 덕분이라는 것을 잊는 것 같다.
<참고문헌>
김유경·구혜령 (2016). 기혼 남성 근로자의 일-가정 향상. 한국가족자원경영학회지, 20(2).
은기수 (2018).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경력단절. 한국인구학,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