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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5. 2020

나는 은수저도 쓸 수 없는 그저 주부

신혼이라고 하면 흔히 허니문이라고 불리어지듯이, 행복한 시간으로 묘사된다. 물론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고, 결혼을 통해서 파트너와 일상을 함께 함으로써 부부는 행복한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행복한 시간임과 동시에 신혼의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남편과 어렵게 결혼을 했다. 남편과 나이차가 좀 있어서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한 결혼인데, 결혼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형식적인 관계가 그립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관대한 척하면서 나에게는 짜증을 많이 부렸다. 그 짜증이 나는 몹시 싫었는데, 남편이 유독 나한테 짜증을 부리는 이유가 우리가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으로 보였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형식적인 관계에서라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의나 매너를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우리는 친밀한 관계에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결혼 3개월 차의 어느 날 ‘나의 자아가 오염되고 있다’는 슬픈 메모를 하였다. 회복이 곤란한 것 같았고, 나는 외로운 투쟁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형식적인 관계가 가능한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했고, 결국은 일이 문제구나, 직업을 가져야 하겠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했다.

신혼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끝내고, 해물전골을 해 먹고 남은 미나리를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더니 여태껏 눈에 띄지 않던 얼룩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닦아 내고 행주로 다시 닦아 냈다. 막 결혼한 새댁이었던 나는 그 일을 하면서 너무나 분노했다. 남편은 그 문제에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 문제가 나만의 관심사라는 점 때문에 나는 분노했던 것 같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남에게 나타내고픈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데, 가사노동의 성격이 비공개적이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할 때, 그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느꼈던 것 같다.

나만이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일에 자신이 없고 마음속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똑같이 성취와 자아실현을 강조하면서도, 한편 맛있는 손수 지은 식사와 깨끗한 공간을 여성이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 맛있는 식사와 깨끗한 공간을 위해서 나는 냉장고의 얼룩을 닦고 싱크대에 흘린 물을 닦았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일을 내일도 무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자아는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부의 인간관계가 특이한 것 같았다. 주부의 인간관계의 특성은 주부의 일의 특성이 결정짓고 있는 것 같았다. 주부로서 나는 집에서 고독하게 집안일을 했다. 경산 신혼집에서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혼자 남겨져서는 가사노동을 할 때, 너무 말이 하고 싶었다. 내가 말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거지할 그릇, 빨랫감, 먼지, 쓰레기 등은 내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손과 발을 필요로 할 뿐이었다. 나는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을 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나의 친정 동네도 아니고 학교가 있는 곳도 아닌,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이었으므로,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유일한 나의 대화 상대였던 남편에게 매우 의존적으로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자주 나에게 쌀쌀맞게 대했고, 이로 인해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자주 받았고, 무기력해졌으며, 부정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 같았다.

또한 주부는 수직적인 인간관계(시어머니, 아기)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많고, 그 속에서 여성의 자아는 왜곡되고 기질은 꺾이는 것 같았다. 깔깔대고 싶고, 잘난 체하고 싶은 모든 욕구를 풀 제도화된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혼 선물로 은수저 세트를 받았는데, 어머님께서 그 수저 중 한 짝을 아주버님께 드렸다. 남편만 은수저를 쓰게 되었다. 시댁 식구의 태도나 지시사항에 따르다 보면 나는 천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한 것 같았다. 나는 은수저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직 돌이 안 된 첫째를 데리고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하던 때, 어머님이 우리 집에 아침에 아이를 봐주러 오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부산하게 나를 꾸짖으셨다. 내가 어머님만큼 언성을 높이자 남편이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정신건강을 위해서라고 하자, 남편이 ‘정신건강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 순간 남편에 의해서 멀쩡한 정신을 갖고도 정신병원에 갇혔을 수많은 여인들, 아주 상식적인 태도를 지니고서도 이상하다고 비난받으며 살아갈 무수한 여인들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그런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친정에서 똑 떼서 시댁이라는 곳에 심어 놓는 이 결혼제도는 여자의 불행·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하면 정신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내 신혼의 추억을 떠올려보니 그때 느꼈던 서글픔이 다시금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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