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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8. 2020

녹찻잎이 쓴지도 몰랐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도저히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나는 좌절감이 느껴질 때면 생쌀을 집어서 씹어 먹었다. 이가 다 망가지는 것 같았지만, 너무 초조할 때는 그렇게 했다. 공부할 것은 많은데 시간은 없을 때 그래서 속이 탈 때 통깨와 녹차를 먹었고, 남편의 말도 안 되는 통제 때문에 속이 너무 답답할 때는 무작정 걸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닐 때, 과제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평일에는 아이들을 돌보다가 주말이 되면,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보내고 과제를 몰아서 하고는 했다. 정책집행론 수업의 과제가 가장 부담스러웠다. 한 주 동안에 세 편의 지정된 영어 논문을 읽고 요약을 하고 비판적 검토를 해서 수업이 있기 전 날까지 교수님께 이메일로 제출해야 했다. 주말에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보낸다고 해도, 워낙 읽어야 하는 논문이 어렵고 양이 많다 보니 항상 초조했다. 그럴 때 내가 찾은 것은 통깨였다. 어머님이 요리에 쓰라고 보내 주신 볶은 깨가 있었는데, 초조할 때, 통깨를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집중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통깨가 떨어진 것이다.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한데 통깨를 먹을 수 없으니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내 눈에 뜨인 것이 녹차였다. 잎 그대로의 녹차를 손에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러면 왠지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녹차도 떨어졌다. 녹차 대신에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니 보이차가 있었다. 나는 보이차를 툭툭 떼서 입에 넣고 씹었다. 녹차와는 다른 맛이 났다. 보이차가 떨어졌을 때는 철관음 차를 먹었고, 그것이 떨어졌을 때는 바늘처럼 뾰족하게 생긴 차를 먹었다. 거의 차를 일곱 여덟 통을 먹어 치웠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녔을 즈음인 2002년인가 2003년 어느 여름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런데, 남편이 나에게 무언가 싫은 소리를 했다.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천 원짜리 몇 장을 챙겼다. 당시 경산에 살고 있었는데, 경산 체육고등학교 근처 집에서 출발해서 영남대학교를 지나 대구대학교로 갔다.

영남대학교 정문 앞 한 상점에서 모자를 하나 구입했다. 돈이 모자라서 주인에게 모자라는 돈을 다음에 갖고 오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영남대에서 대구대를 향해 걸었다. 당시 나는 대구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어서. 대구대학교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늘 차를 몰고 갔던 길을 걸어서 갔다. 인도가 끊어지고 과수원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약 4시간을 걸어서 대구대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학교에 들어가서 아는 교수님의 연구실에 가서 잠깐 말씀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교수님께 원서를 한 권 빌렸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원 석사과정 다닐 때, 결혼 후 나는 서울 기숙사에서 지내고, 남편은 경산에서 지냈을 때, 격주로 주말에 경산 집에 갔다. 금요일 밤에 내려갔는데 토요일 아침에 남편이 없으면 몹시도 서운했었다. 남편은 토요일 오전에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 나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마음이 참 쓸쓸했다. 임신을 했는데도 남편이 토요일 오전에 사라지니 너무나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어느 토요일에 나는 혼자서 집을 나와서 경주에 놀러 갔다. 내가 좋아하는 불국사와 분황사를 갔고, 혼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간혹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내게는 통깨와 녹차와 걷기가 일종의 담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요즘도 종종 통깨를 먹는다. 그렇지만 녹차는 도저히 못 먹겠다. 이 쓴 것을 어떻게 그냥 먹었지? 당연히 요즘은 녹차를 물에 우려내서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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