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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Aug 08. 2022

차라리 이곳으로 근무지이동 하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잘못된 선택 하나 – 근무지 전출에 대한 후회

인생을 되돌려 생각해볼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일들이 많다. 특히 나이가 50이 넘어가니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반추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거대한 인생의 플랜 중에 제대로 된 선택, 탁월한 선택,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냥 평타 내지 차라리 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어쩌면 이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잘못된 선택중 하나는 19년 전 했던 근무지 교류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더욱 소름 끼치는 일은 그땐 그 선택을 번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것이다. 차라리 그때 리턴했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후회로 확 다가온다는 사실에서 인생이란 어렵고 결코 쉽지 않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20년 전 집에서 사무실까지 왕복 3시간 거리를 출퇴근하고 있었다. 집은 광역시였지만 근무지는 시골 군이었다. 그곳은 나의 고향이기도 해서 업무상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거리가 멀어 출퇴근이 힘들어 아이들 케어하는 것도 미래를 생각해볼 때 어려운 일들이 생길 거라는 아득한 생각뿐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가족 와 함께 가까운 곳에서 산다는 것이 누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직장 때문에 그것조차 힘든 현실이 더욱 힘들게 다가왔다. 그곳이 내 고향이기에 내게는 더없이 편한 곳이지만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가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혀 연고도 없지만 남편 회사 사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과 한 시간 거리의 군으로 교류 신청을 했다. 아니 그건 일방적인 전출이었다. 나와 교류한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집에서 휴직기간 내내 인사팀으로 전화를 돌리고 낯선 곳이지만 사택이 있어 가족과 생활할 수 있고 직장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곳은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너무도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차라리 도시로 전출 가는 것이 편했을까. 지역색이 전혀 다른 시골에서 시골로의 전출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인복이 좋아서 발령 난 곳에서 좋은 인연을 맺었더라면 만족스러운 생활이 되지 않았을까. 새로 발령 난 곳에서는 면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도 과거 내가 근무지에서 근무했던 사람의 성향과 너무 많이 달랐다. 적응하기도 바쁜데 그곳과 이곳의 차이점에 대해서 그걸 보고서로 요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치 이곳에서의 나의 앞날을 예고하는 몇몇 일들이 있었다. 내 고향은 십 년에 한 번 눈이 올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는데 이곳은 추위와 눈이 일상이 된 곳이었다. 게다가 뉴스에 크게 나올만한 폭설에 피해조사에 적응하기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인복도 없어서 환대도 받지 못하고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지역색인지 사람들 성향인지 극복 못해서 수년을 속 끓이며 애탔던 시간들이 지금 와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버텨냈는지 그 시간들이 너무 안타깝다.             

                  

문제는 언제나 결과론적으로 평가해 볼 때 확실한 명암을 드러낸다. 그 당시 무조건 근무에서 전출하고 타시군으로 전입하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다. 그곳에서도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며 일을 하니 일하면서 개인 간 발생되는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극복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고 무엇보다 가족을 위한 나의 소소한 희생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그래서 당시 적응하기 힘들었을 때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조차 못했고 그 당시 확실하게 들었던 생각은 ‘고향 버리고 가더니 잘 되었다’라는 말을 듣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생각 못했지만 지금 20여 년이 지난 즈음 생각해보니 차라리 그때 한두 달 힘든 시간을 겪었을 때 다시 내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걸 하는 것이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것은 두 번째이고 긴긴 시간 동안 적응하느라 고통스럽게 에너지 쓸 일도 없었을 것이고, 편한 곳에서 그냥 즐기며 살았더라면 또 다른 대안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그땐 리턴한다는 생각조 차를 못했고 아니했더라도 그건 금기사항이라고 맘에 못을 박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땐 지금보다 젊었었기에 적응할 수 있고 뭐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름 판단했던 거 같다.      


이제와 시간을 되돌려보니 여기와 서도 크게 내 인생 거대한 랜에서 제대로 이룬 게 없는 거 같다. 그래도 한 가지만 집어보라고 하면 영어교육을 갔던 것 외엔 딱히 없다. 아이들도 딱히 이 학교 아니면 안 되었다는 그런 강렬한 적응 같은 것도 없고, 나 역시 여기서 엄청난 소중한 인연을 만난 것도 아니고 여기 안 왔으면 어쩔뻔했나 하는 일도 없다. 여기서도 될 일은 아마 그쪽 내 고향 쪽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난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어디서 전입 왔다는 꼬리표는 퇴직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때도 아무 연고도 없다는 것이 뿌리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도시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시골에서 근무하다 보면 고향이 어디고 , 누구 집 자식이고 누구누구랑 아는 게 근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것이다.      


결국 난 삼 심대 중반 인생의 큰 선택에서 실패했다. 그때는 생각조차 못했던 리턴이 이제와 생각날게 뭐란 말인가. 물론 고향에서 계속 있었을 때 승진 누락 시에는 심하게 전출을 고려할 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어쩌면 그곳에서 차라리 도시로 전출을 했더라면 또 다른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필요한 맘고생은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이 50이 넘으니 딱히 기대할 만한 일도 생기지 않고 즐거운 일보다 안 좋은 일들이 더 많이 다가온다더니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기대하고 있나보다.      


확실히 인생은 어렵다. 매번 현명한 선택을 하는 거 같아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평가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나의 근무지 이동은 오십 넘어서 실패였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그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텐데. 이제부터라도 나의 행복을 무시한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해 본다. 정년까지는 내게 7년 정도의 시간이 있다. 애들도 성장해서 아이들 케어를 위한 근무지 교류나 전출 같은 건 없을 테지만 7년이라도 그것이 아니라도 그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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