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에게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 하지 않기
면장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모를뻔했다.
내가 현재의 면사무소에 발령받은 지 6개월이 지났지만 50개가 넘는 마을이라 아직도 완벽하게 어느 마을이장인지 얼굴과 잘 매칭이 되지 않는다.
작년 연말 인사발령으로 인한 전 직원 환송식이 있었다. 환송식에는 술도 빠질 수 없다.
회식을 할 때 나의 경우 면장과 얼굴을 마주대고 볼 수 없는 방향의 같은 라인을 선호한다. 그래야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맘껏 리필해 먹으며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면장과 마주 보는 자리 나 대각선 자리 같은 경우 면장이 가끔 밥 먹다가 직원들 얼굴을 훑어보는 경우도 있다. 그 시선 자체도 상당히 부담스럽고 식탐을 부리기에도 불편한 자리이다. 또 운나쁘게 면장이 있는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내내 고기를 굽거나 면장이 주는 술까지 억지로 받아야 하고 보는 앞에서 원샷을 해줘야 하는 온갖 불편함을 고스란히 감수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날도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빛의 속도로 남들보다 5분이나 10분 정도 앞서가서 자리를 선점했다.
면장과 같은 라인 먼 곳에 앉아서 다행히 평온하게 마음껏 먹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면장이 자기 자리에서 얼굴을 쭉 빼며 '복지팀장'하고 부르는 것이다. 이미 얼굴은 술로 흑색이 된 상태였다. 내가 앉은자리는 면장의 관심밖 자리일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는지도 의문이었다.
거리도 조금 있는대서 목을 쭉 뺀 면장은 술이 들어간 목소리로 아주 느리게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어느 이장이 나한테 와서 말하기를, 복지팀장이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마치 안 올 것을 온 것처럼 따지듯 들려서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고 하더구먼...'
"네???"
"제가 그랬다고요?"
"그래서 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맞이하는 특성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어깨를 치기도 하는데 복지팀장에게는 나름 반가워서 하는 말일 건데, 느낀 대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본 대로 오해하지 마시라라고 했네"
"네..(저를 대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지만 깊은 의문이 밀려들었다. 그런 말을 한 기억조차도 없고 내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면 나랑 친분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또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어본 것이 관심 아닌가. 기분이 좋지않아 그걸 면장한테 올라가서 말했다는 것은 복지팀장을 혼내주라는 뜻인가.
면장은 그 말에 연이어 '앞으로는 이장들이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인사만 하고 따뜻하게 허그해 주며 맞아주게'라고 웬 허그 같은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넣으며 자신이 날 대변해 주었다는 걸 유머스럽게 표현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니 그 회식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했으면 바로 인터폰 해서 '당장 올라와 보라'라고 했겠지.
도대체 어느 이장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날 이후 50개 마을 이장들의 얼굴과 과거 나의 발언의 기억을 추적해 봤지만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억울함만 쌓일 뿐이다. 의심 가는 이장을 살짝 떠보기도 했는데 그 이장을 탈탈 털며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아직도 미스터리다.
앞으로 어느 이장에게도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장이 와도 아는 척도 안 한다는 말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내 말투가 좀 세서 오해도 많이 받지만 이렇게 뭔가 도움을 주려고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어봤을 텐데 이것으로도 기분이 나쁜 이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 역시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뜻일수도 있다.
이제 더 조심하며 찾아오는 이장이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천천히 해야겠지만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앞으로 찾아오는 모든 이장에 대해 매의 눈으로 '혹시 이 이장인가 '하는 의심의 눈으로 노려볼수도 있고 그러다 그 이장이 또 면장한테 내가 째려본다고 날 고발할 수도 있다. 살면서 말도 안 되는 오해도 많이 받아보고 살아왔다. 면사무소 생활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과 관련된 감정소모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