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과거의 기억에 매몰된다. 하는 일 없이 주말에 집에 있다 보면 과거의 기억 속에 계속해서 빠져들고 좋은 추억보다는 안타까운 기억의 늪에 침몰한다. 그 상태에서 달아나기 어렵다. 그래서
노년에는 혼자 있는 시간엔 뭔가 취미활동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는 날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의 늪에 쉽게 빠져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서는 신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 그 선택이 나로서는 최선이었고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억지로 자신의 과거 모습을 탓하며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나는 늙지 않을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무방비하게 나이를 먹기 때문에 준비 없이 맞이한 삶은 늘 그러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특히 여자들은 50이 넘어가니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한다. 또 50이 넘어가면 편할 줄 알았는데 자녀들의 사춘기와 겹치면서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부모님들의 건강악화와 겹치면서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슬기롭게 50대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더 활기찬 60대를 맞이할 수 있다.
쇼핑몰같이다중집합장소를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오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유독 어떤 노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유난히 멋쟁이처럼 차려입고 주름하나 없이 겉으로 봐도 부가 철철 넘쳐 보이는 노인들이다. 정확한 나이도 분간할 수 없다.
평일 휴가를 내고 만년필 수리를 맡기러 백화점에 갔을 때 일이다.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 카페를 지나 올라가는데 카페 손님대부분이 노인이었다. 그들은 몇 테이블씩 차지하고 조용히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고 혼자 앉아있는 흰 중절모에 흰 양복에 백구두를 신은 남자노인은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순간 아 이게 바로 부유한 노인들의 일상이구나 하는 생각과 어쩌면 우리 자녀들은 우리들보다 더 소득이 높은 생활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요로운 노년을 보내는 노인들을 보며 저렇게 마음의 여유가 묻어나는 노년생활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꼭 돈이 있어야만 노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가에 대해 서는 솔직히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원초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노년의 품위는 경제적인 여유에서 나온다고 부인할 수 없다. 돈이 있어야만 노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여유와 품위는 다르지만 여유가 있다면 품위는 따라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골에서도 일반 노인들에 비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도 단돈 몇만 원에 수전노처럼 민원을 넣고 이장을 의심하는 진상인 노인을 보아온 터라 여유와 품위가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여유롭고 품위 있는 노년에겐 경제적인 자유가 필수인 건 부인할 수 없다.
우연히 47년 전 국민학교 선생님이 떠올라 혹시 해서 인터넷으로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2008년도 정년퇴직하셨고 퇴직 2년 전부터 문화센터에서 그림배우다 본격적으로 그림 배운 후 국내 크고 작은 각종대회에서 열몇 번의 상을 받은 화가로 활동하고 계셨다. 게다가 우연히 불교에 심취하여 열성신자가 된 인터뷰기사도 보게 되었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남편분과 함께 우아한 취미생활의 노년생활을 보내고 있는 그 선생님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도 조금씩 미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수채화 도구와 책을 구입했고만년필 드로잉북도 구입했다. 이제 진짜 여행하고 다니며 만년필로 드로잉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드로잉은 내가 늘 꿈꾸던 것이다. 여행 가서 현지 정취를 사진으로 찍을 수도 있지만 만년필을 이용한 드로잉 또한 좋아하는 만년필로 할 수 있어 더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퇴직 후 웹소설도 도전해 볼 계획이다. 그리고 영어공부는 꼭 무슨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영어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냥 재밌다. 하루하루 뉴스가 조금씩 귀에 들어오는 것도 재밌고 새로운 말을배우며 연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 왜 영어를 하나요 하면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 과정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