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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Oct 13. 2024

비오는 취리히

5년 만에 오는 공항이라 그런지 공항 사용법이 서툴다. 미리 몽블랑 로열블루 잉크 한 병을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픽업했기 망정이지 몽블랑 매장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잉크 붉은색을 더 사보려고 찾았으나 없었다. 그런데 네이버카페에 글을 올리니 몇 번 게이트 종합판매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난 241번 게이트에 있었고 곧 출국시간은 다가오고 있어 251번 게이트로 가기엔 무리였다. 미리 조사해보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얼마를 더 주고 비상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으나 공항에서 커피하나는 마셔줘야지 하며 출국시간 임박하게 산 커피는 다 마시지 못하고 들고 타야 했다. 배낭에 커피에 여권에 정신 사나운 와중에 창가 쪽 앉는 짧은 파마머리에 노랗게 탈색한 한국여성이 "배낭은 위로 올리는 게 좋겠어요"하며 내 커피를 받아주었다. 트렌치코트까지 전부 위로 올렸다.


해외 갈 때 비상구 근처에 앉아본 건 처음이라 어디에 이어폰을 꽂는지도 그 여성에게 물어보았고 모니터를 옆에서 올려서 보는 것도 가운데 앉은 스위스 남성을 보고 알게 되었다. 또 좌석시트 불이 꺼져야만 이동하는데 화장실 가려고 일어섰다가 남자 승무원이 앉아야 한다고 했다. 옆 스위스 남성은 좌석벨트 불이 안 꺼졌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말이다. 가운데 열 옆좌석 옆에 앉은 고령의 할머니는 무척 괴로워 보였다. 딸들과 함께 가는 거 같은데 딸들과 좌석은 달랐다. 아마 딸들은 뒤에 앉고 할머니는 다리를 쭉 펼 수 있는 곳에 앉게 한 것 같았다. 내 바로 옆에는 공항에서부터 종이를 들고 체크하는 것으로 보아 관광가이드 갔았는데 취리히 공항에 내린 거 보니 엘관광 깃대를 들고 서 있었다.


국적기의 좋은 점은 식사가 좋다는 것이다. 갑자기 메일로 식사를 선택하라는 걸 보고 호기심 많은 나는 갈 때는 해산물식 귀국 시는 과일식으로 한번 신청을 해보았다. 그런 특별식으로 신청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몇 분 더 먼저 갖다 주는 걸 알게 되었다. 생선과 조개관자와 브로콜리를 양념과 함께 주는데 느끼하지 않고 탄수화물도 없어서 비행기에서 먹기엔 적격이었다. 남들보다 몇 분 먼저 식사하기 민망해서 슬로로 한 숟갈 먹다 보니 천천히 먹으니 더 좋았다. 식사를 두 번 준다고 했는데 중간에 또 해산물 간식을 받았고 다른 승객들은 피자 한 조각씩 받았는데 이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간식까지 주고 이제 남은 시간은 2시간 반인데 또 저녁을 주는 것이다. 저녁을 안 주고 간식으로 땡치는지 알고 뒤쪽에 가서 다이제스티브랑 샌드위치, 넛츠, 프레첼을 왕창 집어와서 우적우적 먹었는데 말이다. 또 저녁을 주다니. 간식 포함 3번의 식사가 제공되는데 해산물로 먹다 보니 거나하지 않고 딱 적당했다. 이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생각보다 14시간 이상을 영화 듄을 대충 보다 말다 하다 빅뱅이론을 보다 자다 하다 나중엔 이미 한번 본 파묘를 보고야 취리히에 도착했다.


착 전 창문으로 보이는 취리히의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29년 전 창문밖으로 보던 붉은 지붕과 나무들을 상상했지만 실망스러웠다. 20대의 내게 취리히는 첫 비즈니스 여행지여서 영원히 잊지 못하는데 29년 만에 두 번째를 오다니 참 너무하다. 게다가 나이 들어 감정이 무딜 때 오니 혼자 있어도 딱히 외롭지가 않다는 것이 장점이다. 감정이 무뎌진 것도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런데 갑자기 내가 왜 스위스를 오게 되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스위스에 왔을까.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그때부터 서바이벌게임이었다. 스위스 중앙역에서 어디로 가서 트레인을 타야 할지도 아무리 이론으로 한국서 블로그를 봐도 실전하고 너무도 달랐다. 차라리 물어 물어 가는 게 나을 수 있다. 처음에 어떤 여성에게 물어봐서 겨우 트램 타는 곳으로 와서 또 물어보고 내려서 이젠 호텔 가는걸 캐리어 든 여성에게 물어보니 나도 똑같이 길을 잃었다고 하소연한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니 집에 두고 온 우산 생각이 났다. 날은 어둡고 캐리어를 쓸고 무단횡단을 하며 돌아 돌아 구글로 찾아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서울처럼 가로등이 많은 것도 아니다. 어스름한 불빛에 비에 완전한 낯선 여행자의 모습이다.


책자에도 나온 호텔을 덜컥 예약했는데 와서 보니 솔직히 너무도 작은 호텔이었다. 이게 삼성급이라니. 머리를 뒤로 묶은 약간 해적역할로 나왔던 조니댑 느낌의 직원이 안내를 하는데 어느 도시에서 왔냐고 했는데 "사우스 코리아"라고 나 한국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졌더니 직원이 "서울" 아니면 "부산" 이렇게 말해달랜다. 그래서 내 도시를 말하니 그걸 알아먹었나 싶다. 자정 이후에는 문이 잠기니 이 암호를 열고 들어오거나 안되면 비상벨을 누르면 자기들이 24시간 근무하니 열어준다고 한다. 그런데 열쇠도 서울에서도 늘 카드키만 생각했는데 방 열쇠 그 자체를 준다. 은색으로 된 묵직한 종처럼 생긴 끝에 달린 열쇠다. 싱글룸으로 예약했으나 없으니 좀 더 큰 룸을 준다고 한다. 역시나 방도 그저 그런 것이 비가 와서 더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아침식사는 잘못 들었는지 10시까지를 10시부터라고 듣고 아침 먹기 전에 얼른 루체른으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7시부터 조식을 줄 것 같긴 하다. 칼라운지에서 가져온 사과와 바나나, 비행기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고 갈려고 했는데 말이다. 루체른은 4성급이고 루체른 역 근처에 있으니 기대를 해봐야겠다. 이제 날짜변경선이 바뀌어서 한국은 일요일 새벽인데 여긴 아직도 토요일 저녁 8시 41분이다. 루체른에서는 리기산을 가서 못 돌아올까 봐 하루는 필라테스를 가고 오후에 시내관광, 하루는 티틀리스 가고 오후에 시내관광 또는 유람선 이렇게 일정을 짜야할지 고민이다. 호텔방에 냉장고가 없으니 샌드위치를 얼른 먹어치워야겠다.

비오는 저녁인데 사진이 잘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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