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취리히의 칙칙함은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호텔의 분위기 때문에도 얼른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여행책자에도 나오는 호텔이라 기대를 너무 크게 했던 탓일까. 다음날은 비가 안 올 거라 생각했다. 먹을까 말까하다가 7시에 나가면서 조식이 궁금해 갔는데 정말 먹을게 크로와상과 치즈밖에 없었다. 내린 커피도 별로였고 삶은 계란과 치즈 몇 개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나왔다.
나보다 먼저 몇몇 여행자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밖을 나오니 또비가 오고 있었다. 건물만 넘으면 중앙역이라는 말에 구글 안 보고 감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점점 빗줄기는 굵어지는데 앞에서 모녀가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당연 한국사람인줄 알고 "중앙역 가시나요?" 하니 솔라솔라 중국말이다. 모녀는 반응 없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전진만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가다 옆을 보니 바로 중앙역이다. 이런 중앙역과 멀어질뻔했다. 양말까지 촉촉해진 기분이다. 다시 리턴해서 비를 맞으며 건널목을 건너 미친 듯 중양역 안으로 들어가니 플랫폼 숫자가 보이는데 루체른은 몇 번째 플랫폼으로 가라고 하는지 다 쓰여있었다. 매장을 들어가 볼까 하고 가까이 가니 이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앞에 웬 남자가 있길래 "Is this Luzern"했더니 오케이 하길래 주저없이 올라탔다.
루체른으로 가는 열차는 왼쪽에 앉으라고 해서 착실히 왼쪽에 앉았다. 열차를 나 혼자 전세 낸 듯 아무도 없었다. 기대했던 스위스 여행이 드디어 시작이 된거 같았다.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다 젖어버린 청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카톡도 보고 하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 방송이 나왔다. 라스트 어쩌고 하다가 다시 빠꾸를 하는 것이다. 분명 처음 화면에 루체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이건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아까 그곳이 종점인 듯싶었다. 아무도 없었으면 정말 어쩔 뻔 좀전 역에서 한 젊은 남자가 탔다. 어어폰을 끼고 노트북으로 뭘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하면서 이거 루체른 안 가냐고 하니 이거 아니다 저그에서 내려서 갈아타야 한다고 SBB어플을 보여준다. 나 역시 보면서 확인했더니 4 플랫폼에서 타야 한다고 한다. 오 마이갓... Good luck to you라고 해준다. 미친 듯 Zug역에서 내렸는데 4 플랫폼이 안 보인다. 알고 보니 건너편이다. 비가 오는데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역에서 괴력을 발휘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 숨 가쁘게 다시 올라갔다. 9시 3분에 정확히 기차가 왔다. 보나 마나 루체른행일 것이다. 아니 기차에 루체른이라고 보았다. 노심초사 경로를 계속 보는데 루체른은 적혀있는데 또 다른 글이 나온다. 이거 또 무슨 노선이 바뀌었나 하고 있던 차에 스위스 500명 단톡방에 물어보니 '모두 내리세요. 루체른입니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영어를 안 쓰니 도통 헷갈린다.
드디어 루체른 중앙역에 도착했더니 역시 바닷가가 인접한 곳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돈냄새가 난다. 런던아이의 축소판 같은 거랑 미니자이로드럽과 미니 회전목마등이 항구 쪽에서 운영하고 있고 유람선이 수시로 오고 가고 있었다. 루체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내데스크에 물어 겨우 미리 책에서 공부했고 블로그에서 보았던 코인로커를 찾았다. 진짜 실전과 이론은 너무도 차이가 있다.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다. 먼저 넣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물어서 엑스라지와 투엑스라지 락커가 있는데 비용이 투엑스라지가 더 비싸다. 하루종일 같은 비용인줄 알았는데 몇 시간이 넘으면 추가 요금이 나온다. 일단 티틀리스나 필라투스를 가려고 안내데스크 갔더니 올라가더라도 안개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유람선은 어떠냐고 하니 실제 캠을 보여주니 그 정도는 가능할 거 같았다. 스위스 패스는 무료라 이용 안 할 이유도 없었다. 선착장도 물어물어 갔다. 베기스로 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선실 내부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는데 정말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루체른의 항구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왜 베기스가 볼 게 있다고 하는지 궁금했다. 마치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현빈손예진이 사랑의 불시착을 찍었던 이젤발트와 비슷한 장소가 있었다. 웬 동양인 커플 중 여자가 나를 보며 사진 찍어줄까 했는데 괜찮다고 했는데 그것도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더 오래 그곳을 돌아볼까 했는데 바로 또 다른 유람선이 오고 있었다. 바로 그걸 타고 루체른으로 돌아가는 동안 총 2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루체른 시내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29년 전 와봤던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카펠교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상권이 엄청난 게 발달되어 있었다. 노상카페며 술집이며 식당이며 자리가 없었다. 비가 오다 그쳤다를 반복하지만 사람들은 우산 없이 지나다니며 오거나 말거나 했는데 나 역시 그런 생각이었다. 뭐 어때 여기가 왜 빛의 도시라 했는지 모르지만 루체른인데. 카펠교를 보고 500명 스위스 단톡방에 아침부터 나랑 같이 여행 다니는 것처럼 세세하게 알려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이 근처에 맥주 양조장을 알려줘서 테이크 어웨이를 해서 그걸 들고 29년 전 내가 분명히 갔던 빈사의 사자상으로 향했다. 맥주의 기운이라도 있어야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십분 이상을 걸어 그곳을 갔는데 빈사의 사자상을 본 기억만 나지 그 주변 부대시설을 본 기억은 없다. 사진을 찍고 이제 무제크의 성벽으로 향했다. 그건 다리만 아프고 괜히 갔다 싶었다. 그곳에서 나와 쉬프로이어의 다리를 거쳐 다시 카펠교로 향했고 관광안내책자의 열쇠고리와 초콜릿을 무료로 받았냐는 스위스 500명 단톡방의 스위스 전문가가 물어본다. 키링과 초콜릿을 무료로 주다니 안 갈 수가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난 쿱보다 더 비싼 초콜릿을 10만 원어치 이상을 사고야 말았다. 등에 짐은 점점 무거워지고 거의 12시간을 움직인 탓에 너무 피곤해지고 뭔가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일요일인 탓에 단톡방에서 알려준 식당도 문 닫았고 그러다 네이버 블로그 검색해서 그 양조장에서 돼지갈비를 맛있게 먹었다기에 가보니 그곳은 무조건 술은 기본이고 거기에 식사를 시키는 건데 블로그메뉴를 보여주며 그걸 주문했다. 무려 36프랑이다. 순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주문은 들어갔고 기다리는 순간 옆을 보니 통닭이 전기구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걸 먹을 걸 했다. 저건 36프랑까진 안 할 것 같았다. 나중에 계산할 때 한화로 한 끼 식사에 66천 원을 지불했다. 가성비 좋은 식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여간 후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낼부터는 점심, 저녁을 샌드위치만 먹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제 4시가 넘어서 호텔 체크인을 할 시간이다. 락커로 갔더니 초과요금이 나왔다. 그리고 단톡방에서 알려준 지하 쿱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쉴 거라 생각을 했는데 오산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쿱에서 저녁거리를 살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고 또 한 번 후회를 했고 이곳에서 파는 초콜릿이 그 안내책자에 나온 곳보다 더 저렴한 거 같았다. 별 차이는 없지만 말이다. 아까 그곳은 단체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가이드들이 손님들을 데리고 오는 상점으로 보이며 간혹 한국말도 들렸고 거의가 중국인 관광객들로 보이다. 그 거리가 오메가부터 온갖 명품시계점이 있는 곳이고 대형버스 주차된 것으로 보아 거의 관광의 핫 플레이스였다. 취리히보다 더 어떤 유동성과 활기가 느껴졌다.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아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하지만 거의 물맛이다. 한국에서 먹던게 낫다.
이제 내일 날이 좋으면 티틀리스와 필라투스를 정복해 볼 계획이다. 호텔은 중앙역 바로 옆에 위치한 아주 고급스러운 4성급 호텔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다. 방도 원래 싱글예약이지만 좀더 큰걸로 업그레이드해준다고 선심을 쓰신다. 취리히에서도 그랬는데 업그레이드가 기본인가. 호텔 내에 스타벅스도 있고 바로 옆에 미그로스 식품매장도 있고 저녁에 구경으로 중앙역 지하에 가서 쇼핑하고 놀면 된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도 피곤하다. 10시에는 잠을 자야 낼 아침 6시에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6시 반부터 시작되는 조식을 먹고 티틀리스와 필라투스를 하루에 정복할 계획이다. 낼도 안개가 낀다면 버스를 타고 도시 전체를 샅샅이 돌아다닐 것이다. 루체른이 질려서 다시 오고 싶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